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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축구사에서 가장 주요했던 전술 변천사와 감독들.

GerdMuller2014.01.17 04:32조회 수 4801추천 수 2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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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라는 스포츠는 역사의 시작을 논하기에는 그 역사가 너무 깊다. 정확한 기원도 밝혀지지 않았고, 공식적인 기록이 남기 시작한 년도도 무려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을 열광케 하고 감동을 주었다. 그 찬란한 역사 속에서는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선수들, 축구라는 스포츠에 몸을 사리지 않았던 관중들, 그리고 그 속에는 경기를 운영하고 움직였던 감독들과 ‘팀’을 움직인 전술이 있다. 세계 축구사에서 가장 주요했던, 가장 영향력을 끼친 전술들을 살펴보려 한다.

 

 축구의 전술이란 포메이션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떻게 보면 포메이션은 그저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포메이션으로 선발 대형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기 내에서는 상황에 따른 수많은 전술적 지시와 진영에 따른 부분 전술이 셀 수 없을만큼 많기 때문에 포메이션의 혁신이 축구 전술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고는 보기 힘들다. 따라서 포메이션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포메이션이 전술의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보장할 수 있다.

 

 초기 축구는 현대 축구와는 다르게 수비수보다는 공격수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 이유는 초기 축구에서는 패스를 앞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근대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과 관련이 있다. 고대 축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근대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럭비라는 스포츠가 상당히 인기가 많다. 축구와 럭비는 기원이 같은데, 럭비에서는 전진 패스가 가능하지 않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축구 룰에서는 전진 패스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진 패스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원 톱이나 투 톱 시스템을 기용한 뒤 그들의 개인 능력만으로 수비진을 뚫어내는 공격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수비를 최소화하고 공격에 많은 선수들을 배치하여 드리블을 통하여 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초기 축구의 주 전술이었다. 따라서 1 - 2 - 7과 같은 포메이션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는 초기 축구의 강자였던 로열 엔지니어스나 퀸스 파크와 같은 클럽들이 사용한다.

 

 그러나 1866년, 패스를 받는 선수와 골문 사이에 상대팀 선수가 적어도 세 명은 있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앞으로 패스를 할 수 있도록 규칙이 수정된다. 그러자 수비의 중요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냥 공격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축구는 수비가 가장 중요한 스포츠이기에, 공격의 숫자를 조금 줄이고 수비의 빈도를 늘리는 전술이 유행한다. ‘미드필더’라는 개념은 이 때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규칙 수정 전에는 ‘공격수’와 ‘수비수’, 그리고 ‘골키퍼’로만 포지션이 이루어진 것과 달리 규칙 수정 후에는 공격수와 수비수 사이에 선수들을 배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전술에서 가장 중요했던 선수는 ‘센터 하프’, 2 - 3 - 5 포메이션에서 중앙을 담당하고 있는 선수이다. 그 이유는 공격 전환, 그리고 수비 전환 시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현대 축구로 비유하자면 공격 시에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비 시에는 홀딩 미드필더와 같은 역할을 하는, 팀의 균형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기에 핵심 선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터 하프’ 포지션은 추후에 스위퍼나 리베로와 같은 포지션의 시초가 된다.

 

 그러던 1925년, 전술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오프사이드 룰이 크게 발전한 것이다. 사실 오프사이드 규칙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867년이다. 그러나 현대 축구와 같은 오프사이드 개념이 처음 정립된 것은 1925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현대 축구의 룰이 도입되면서 전술 또한 크게 발전하게 된다. 등번호 또한 이 때 처음 등장한다. 1933년 FA컵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등번호를 마킹하고 경기 진행했다. 아무튼 이런 축구 역사에서 ‘격변’의 시기에서 1920년대와 30년대에 영국 축구를 주름 잡았던 인물은 바로 영국의 허버트 채프먼 (Herbert Chapman) 감독이다. 허버트 채프먼은 그 유명한 W - M 전술을 이용, 허더즈필드와 아스널에 리그 우승을 가져다주며 축구계를 평정해버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W - M 전술을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체계 잡힌 전술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 이유는 선수들의 역할 분담에 있다. 공격수가 W자 대형을, 수비수가 M자 대형을 이루어 이름 붙혀진 W - M 전술. 이 전술을 통해 처음으로 공격과 수비의 역할이 사실상 나뉘게 된다. 이 전까지의 전술에서는 공격수와 수비수가 나누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공격수가 수비를 하기도 하고 수비수가 공격에 치중하는 등 난장판의 형식을 보여왔다. 그러나 허버트 채프먼의 전술은 센터백에게 중앙 공격수를 마크하기 위해 뒤로 쳐지는 것을 요구했고, 풀백들에게는 상대의 측면 공격수들을 마크할 것을 주문했다. 스토퍼 개념의 도입이었다. 허버트 채프먼은 인사이드 포워드의 시초격인 전술을 경기 중에 주문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전술이었고, 현대 축구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역습 축구의 아버지격인 전술이기도 하다. 허버트 채프먼과 그의 전술이 위대했던 점은 단지 전술적인 면만이 아니라, 축구 외적인 부분에서의 개혁도 크게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팀원들끼리의 대화를 도입했고, 실용주의적이고 개혁적인 구단 운영을 펼쳐나갔다.

 

 허버트 채프먼의 W - M 전술이 체계적인 전술의 시발점이었다고는 하나, 20년대의 축구는 여전히 자신의 포메이션 상 위치만을 고수하고, 체력적인 면이 가장 중시되는 ‘몸’의 스포츠였다. 이랬던 축구를 ‘머리’의 스포츠로 전환시킨 인물이 바로 잉글랜드 출신의 감독 지미 호건 (Jimmy Hogan) 이다. 지미 호건은 선수 생활 도중 가지고 있던 의문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술에 적용시키게 된다. 그는 체력 위주의 플레이보다는 볼을 제대로 컨트롤하는 것이 훨씬 더 실용적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볼을 가지고 훈련하는 것이 해롭다고 여겨지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상당히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다. 지미 호건은 도형을 이용한 포메이션 학습을 하고, 볼을 소유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롱패스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차내는 것이 아니라 팀원에게 정확히 연결될 수 있다면 상대의 수비를 흔드는 데에는 롱패스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볼을 끄는 드리블보다는 패스를 중요시했다. 현대 축구에서 중요시하는 모든 것들을 실제로 전술에 적용시켰던 사람은 지미 호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적인 축구가 하나하나 확립이 되어가던 중, 1930년대 지미 호건 이후로 축구의 미래를 정확히 내다봤던 선구자가 몇 명 있다. 첫 번째는 바로 휴고 메이슬 (Hugo Meisl) 이다. 요즘 사람들은 ‘펄스 나인’, 일명 스트라이커가 본래 선에서 내려와 플레이하는 전술이 펩 과르디올라와 같은 젊은 감독들에게서 최근에 개발된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펄스 나인은 1930년대 오스트리아가 사용하던 전술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발한 이가 바로 휴고 메이슬이다. 사실 지미 호건이 생각했던 내용들은 친구였던 휴고 메이슬과 함께 논의했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휴고 메이슬의 오스트리아 또한 지미 호건의 전술적 성향을 겸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다뉴비안 스쿨’이라는 포메이션의 변형을 채택해 짧은 패스와 개인기를 중시했다. 아무튼 휴고 메이슬의 가장 큰 업적은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자리는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티아스 진델라가 지켰다. 이런 혁신적인 전술과 함께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는 ‘원더 팀’으로 불리며 역사상 최고의 국가대표팀 중 하나로 남았다. 휴고 메이슬은 후기에는 너무나도 이상주의적인 팀 운영을 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업적은 역시 그가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고 증명해준다.

 

 두 번째 선구자는 스위스의 칼 라판 (Karl Rappan) 감독이다. Swiss Bolt-Le Verrou 라는 수비 지향적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칼 라판은 후에 일명 ‘카테나치오’라고 불리우는 수비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Verouller 라고 불리우는 최초의 스위퍼 개념도 도입했다. 리베로를 가장 실용적이게 사용한 인물은 프란츠 베켄바우어일지도 모르겠으나, 초기 개념을 도입한 것은 칼 라판이다.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에 선수 한 명을 더 배치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전술을 도입해내며 현대 수비 전술의 초석을 다진다.

 

 세 번째 선구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을 맡았던 비토리오 포초 (Vittorio Pozzo) 이다. 사실 비토리오 포초의 전술은 허버트 채프먼이 개발했던 W - M 시스템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 수비 후 역습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1934년, 1938년 월드컵에서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 5명의 공격수 중 양쪽에 위치한 공격수들이 밑 지역으로 내려오도록 주문하여 미드필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했고, 보다 수비를 안정화 시키고 공격과 수비 사이의 간격을 세밀하고 안정적이게 운영하였다. 특히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는 마티아스 진델라를 최고 수준의 대인 마크 능력을 자랑했던 루이스 몬티가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초기 전술들을 집약하여 월드컵 2회 연속 우승을 일궈낸 것만으로도 비토리오 포초는 명장 반열에 오를만 하다.

 

 그리고 그 이후 세기의 팀으로 남은 1950년대 헝가리 대표팀을 이끌었던 구스타브 세베스 (Gusztav Sebes) 또한 전술의 혁명가로 불리울만 하다. 당시 헝가리는 페렌츠 푸스카스나 산드로 콕치스 같은 훌륭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구스타브 세베스의 전술이 없었더라면 헝가리 대표팀의 전설적인 연승을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전술에서 주목할만한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먼저 포지션의 탈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포지션 탈피는 디나모 키예프의 아르카 디예프가 먼저 구사했으나, 결과로 증명해 보인 것은 구스타브 세베스다. 그리고 전원이 공격하고 전원이 수비하는, 토털 풋볼의 원형적인 구조를 갖춘 전술을 구사한다. 또한 일명 ‘딥 라잉 센터 포워드’의 개념을 최초로 활용했다. 헝가리의 히데구티는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았지만, 다른 스트라이커들과는 달리 수비수들을 달고 밑으로 내려오는 플레이를 자주 보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을 페렌츠 푸스카스와 산드로 콕치스가 침투했다. 이 헝가리 대표팀은 웸블리에서 영국을 완전히 박살내며 허버트 채프먼의 W - M 전술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상상만 해도 무서운 푸스카스와 코치슈의 공격 조합은 헝가리 대표팀을 1954년 월드컵 우승 직전까지 이끄나, 서독의 기적 같은 역전승으로 아쉽게도 실패한다. 하지만 당시 서독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800장에 가까운 보고서가 있다. 그러나 서독의 월드컵 우승은 취소되지 않는다.

 

 전설적인 저승사자 군단으로 유명한 1950년대의 레알 마드리드는 현재 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을 무려 5연패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의 6연패를 결승전에서 끊어버린 팀이 있었으나, 바로 벤피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에우제비우가 아닌 벨라 구트만이 있었다. 벨라 구트만은 공격과 수비 사이의 조화를 중시하였다. 그는 4 - 2 - 4 전술을 주로 활용하며, 보다 공격적이면서도 W - M 시스템에 비해 수비수를 하나 더 늘리고 공격수와 미드필더는 줄이는 변화를 감행했다. 이는 자연스레 숫자적 우위와 수비 안정화를 바탕으로, 에우제비우가 있는 강력한 공격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벨라 구트만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벤피카를 지도하면서 수많은 우승을 이끌어내는데, 남미의 축구를 크게 발전시켰고, 축구의 낭만주의를 지도했다는 평을 받는다.

 

 어쩌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술가일지도 모르는, 현대 축구 전술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인물은 바로 러시아의 빅토르 마슬로프 (Viktor Maslov) 이다. 구스타브 시베스의 4 - 2 - 4 전술이 허버트 채프먼의 W - M 전술에게 종말을 고하며 유행이 되고 있었다. 그의 파생 전술은 4 - 3 - 3 또한 유럽의 여러 클럽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르 마슬로프는 현대 축구의 가장 기본적인 포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4 - 4 - 2 를 4 - 3 -3 을 사용하던 디나모 키예프에 정착시킨다. 빅토르 마슬로프는 그 어떤 축구 감독보다도 조직력을 중시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공을 오랜 시간 소유하고 있는 선수를 달갑지 않아 했다. 또 그가 파생시킨 하나의 혁신적인 전술은 바로 압박에 관한 것이다. 당시 선수들은 자신의 포지션을 철저히 지키고, 거리를 유지하는 ‘존 디펜스’의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빅토르 마슬로프는 이의 취약한 수비력을 개선시키기 위해 압박의 개념을 도입한다. 상대편 선수가 돌파를 시도할 때, 예전에는 수비수가 거리를 유지하며 수비했다. 그러나 빅토르 마슬로프는 드리블을 시도하는 선수가 있으면 다수의 선수가 한꺼번에 달려들며 수비를 하도록 주문했으므로 수적 우위도 지닐 수 있었다. 이는 상대 공격수들에게 부담을 주기에도 충분했다. 빅토르 마슬로프의 전술을 초기에는 폄하되기 일수였으나, 성적으로 증명하며 모든 비난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그의 전술을 받아들인 감독들 또한 대단한 성적으로 팬들에게 보답했다.

 

 이탈리아의 빗장 수비 카테나치오 - ! 축구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전술을 만든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네레오 로코 (Nereo Rocco)와 엘레니오 에레라 (Helenio Herrera) 이다. 이 둘은 이탈리아의 포백과 골키퍼 사이에 한 명의 수비수를 더 놓는 형태인, 즉 1 - 4 - 3 - 2 의 형태를 띄는 전술을 선보인다. 포백이 뚫릴 시에는 다시 한번 포백을 커버하고, 전체 수비를 지휘하고, 때로는 공격까지 가담하는 만능형 수비수가 바로 리베로다. 3명의 미드필더 중 한명의 미드필더는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면서 마찬가지 포백이 뚫리거나 자리를 비울 경우 그 자리를 지키는 형태를 뛰는 그 유명한 카테나치오 전술은 엘레니오 에레라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 또 엘레니오 에레라는 관중을 이용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물론 리베로의 형식이 1930년대 칼 라판에 의해 최초로 고안되었지만, 당시 라판의 스위스는 수비수가 3명에 골키퍼와 수비라인 사이에 1명을 두어 총 4명이었던 데에 비해 로코와 에레라의 전술에서는 수비수 5명을 두어 그들만의 전술로 재탄생시켰다. 전술의 선구자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가장 실용적이게 쓴 감독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네레오 로코와 엘레니오 에레라의 전술은 당시 그들이 맡고 있던 인테르 밀란과 AC 밀란이 1960년대 유럽과 세리에 A를 지배하도록 했을뿐만 아니라, 추후에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과 수많은 이탈리아 클럽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이 때 인테르 밀란에서 뛰던 지아친토 파케티를 보고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수비수의 공격 가담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고, 그 이후 그가 리베로 포지션을 소화해냈다는 설도 있다.

 

 공간 축구, 강력한 압박, 수비 라인의 전진과 오프사이드를 이용한 수비, 수비수들이 공격 가담과 공격수들의 수비 가담.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모여 있는 듯한 이 목록은 1960년대의 아약스와 1970년대의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었던 전술적 특징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리누스 미헬스 (Rinus Michels) 가 있었다. 1950년대에 세계 축구를 주름잡았던 헝가리 국가 대표팀이 전원 수비와 전원 공격 형식의 전술을 구사했으나, 체력적인 부담 등의 문제로 완벽하게 구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리누스 미헬스의 팀은 오프사이드를 이용한 영리한 수비를 이용해 수비 라인 자체를 전진시키며 체력 문제를 보완시켰다. 그리고 그로 인해 줄어든 체력 부담은 강력한 압박을 통하여 소비했다. 그리고 패스를 통해 경기를 풀어나감으로써 ‘아름다운 축구’ 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이 전술의 중심에는 단연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는데, 그는 정확한 조율 능력과 때에 따라 필요한 돌파 능력과 득점 능력, ‘축구화를 신은 피타고라스’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정확한 패스 능력으로 1960년대의 아약스와 1970년대의 네덜란드를 전설적인 팀으로 남겼다. 다만 아약스가 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에서 3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반면 네덜란드는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우승 후보로 꼽히고도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패배하면서 우승에 실패한다. 네덜란드는 1분만에 선제골을 넣었으나, 토털 풋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베르티 포그츠등의 선수들에게 공격을 차단 당했으며,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골 결정력을 보여준 게르트 뮐러가 결승골을 꽂아 넣은 서독에게 2 : 1 로 패했다. Totaal Voetbal, 즉 토털 풋볼이라고 불리우는 이 전술은 현대 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술로 남았다.

 

 리누스 미헬스 이후로는 빅토르 마슬로프의 가르침을 받은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Valeriy Lobanovskyi) 가 또 다른 토털 풋볼의 대부로 등장하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하나로 남았다. 과학적 시각에서 축구로 접근하고자 했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는 통계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통해 팀을 운영했다. 그는 이후 시스템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는 특징적 시스템에서 축구는 22가지 요소로 나뉘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특정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과 한정된 부분에서의 법칙' 이라는 두 가지 서브-시스템이 각각 11개의 요소로 나뉘어 있는데, 만약 이 두 가지 서브-시스템이 동일한 작용을 할 경우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게 되고, 어느 한 가지 시스템이 강하게 작용할 경우에는 승패가 갈리게 된다는 것이다.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는 이런 서브 - 시스템들의 특성이 기존의 요소들을 총괄한 효과보다 더욱 우수하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그가 맡았던 디나모 키예프 가까이 위치한 키예프 연구소에서부터 생각한 수학적, 과학적 기술이 얼마만큼 잘 준비가 되었는지가 축구에서의 결과도 좌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축구는 개인이 아닌, '시스템'과 '과학적 사고'가 연결되어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는 어쩌면 역사상 최고의 전술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팀의 플레이와 시스템을 모델링하고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접근을 했다는 부분에서 마치 과학자를 연상시키는 감독이다. 그는 빅토르 마슬로프 못지 않게 디나모 키예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전술적으로도 뒤떨어지는 감독이 아니었으며, 리누스 미헬스와 함께 토털 풋볼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이는 그가 한 말에서 잘 들어난다. “공을 소유하면 최대한 넓히고, 공을 뺏기면 최대한 좁혀라 !”

 

 그리고 1980년대 현대 압박 축구를 집대성시킨 감독이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아리고 사키 (Arrigo Sacchi) 이다. 압박은 1800년대부터 존재해왔지만, 이를 실용해서 체계화시킨 것은 바로 아리고 사키이다. 아리고 사키는 4 - 4 - 2 포메이션을 이용, 간격과 유지 압박의 개념을 널리 퍼뜨렸다. 이는 ‘존 프레스’ 라고도 불리운다. 사실 아리고 사키가 압박 전술을 구상한데에 큰 공헌을 한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다. 디에고 마라도나를 도저히 1 : 1 방어로는 막을 수 없자, 아리고 사키는 여러 명의 선수로 마라도나를 둘러싸 수비를 하는 방식을 고안해내게 된다. 그러나 영리했던 마라도나는 수비수들이 자신을 집중 마크한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 선수들과의 패스를 통한 연계 플레이로 압박을 벗어난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압박 전술을 유행시킨 동시에 그에 대한 해법도 제시한 셈이다. 아무튼 아리고 사키는 토털 풋볼 이후로 전술적인 진전이 없었던 세계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며 현대 축구의 시작을 알린 사람이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전술인 카테나치오를 붕괴시키고 압박 전술을 사용한, 축구계의 이단아라고도 할 수 있다.

 

 아리고 사키의 혁명적인 전술이 자리 잡은 뒤, 아직까지 역사에 남을만한 전술적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스페인의 호셉 과르디올라 (Josep Guardiola) 가 일명 ‘티키 - 타카’ 라고 불리우는 패스 플레이를 이용해 세계 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혁명을 일으킨 전술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여러모로 사람의 인생과 비슷하다. 역사가 반복된다고 하듯이, 전술의 역사도 반복되고 있다. 1930년대에 사용되었던 펄스 나인이나 제로톱과 같은 전술들이 현대 축구에서도 최상위의 팀들이 사용하고, 1930년대에 사용되었던 리베로가 현대 축구에서 중요하게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전술의 역사는 반복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는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 세계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릴 가능성도 충분하고, 그 가능성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술을 연구하고 있는 여러 축구인들에게 달렸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 본 칼럼입니다. 사실 칼럼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민망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축구사에서 가장 주요했던 전술 변천사와 감독들에 대하여 다루어 보았습니다.그래도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축구 전술에 대해 정리를 하고 더욱 더 공부하려는 의도로 작성한 것도 없지 않아 있으니 제가 틀리게 서술한 부분이나 정당한 지적과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무분별한 욕설만 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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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정성들여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몰랐던 내용들을 많이 배우고 갑니다^^
  • 하얀근성님께
    GerdMuller글쓴이
    2014.1.17 12:59 댓글추천 0비추천 0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
  • 축구 전술사 책의 서문이나 마무리라는 느낌이 드는 글이군요. 본문에서 언급한 사항들은 이 정도 분량으로 제대로 다루기는 너무 방대한 내용이고 본격적으로 얘기를 풀어 나가기 전/후에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글에 가까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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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91 로벤84년,리베리83년9 ysfos 2014.06.21 5106
42390 (빌트) 차가운 도시의 레이서, 도니스 압디야이6 pedagogist 2014.10.29 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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