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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972년 서독의 '람바참바'풋볼

불꽃싸다구2014.04.18 10:44조회 수 4746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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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src="http://adserver.uniqube.tv/html/Fmkorea/news468" width="800" height="150" frameborder="0" scrolling="no" topmargin="0" leftmargin="0" marginwidth="0" marginheight="0" allowtransparency="true"></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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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世紀)의 팀(Jahrhundertelf)'

'환상적인 팀(Wunderelf)'

'드림팀(Traummannschaft)'

'역사상 가장 뛰어난 독일 국가대표(Die beste deutsche Nationalelf aller Zeiten)'


격동의 시대


1970년대 독일은 격동의 시대였다. 

사회에선 68년 프랑스 5월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내에서도 시작된 68 운동의 여파가 계속 되고 있었고,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7시즌 동안 챔피언이 바뀌어오던 혼돈의 시기가 정리되고 양강의 시대가 도래하던 중이었다.

1968-69 시즌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우승을 거두고 다음 시즌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가 챔피언을 빼앗아 온데 이어 

다음 시즌에도 우승을 거두면서 묀헨글라드바흐는 독일 분데스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를 연패한 팀이 되었다.

그리고 1971-72 시즌 곧바로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하면서 다시 챔피언의 자리를 빼앗아 와 리그내에서의 치열한 대립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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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던 시대의 두 주인공,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의 귄터 네처와 바이에른 뮌헨의 프란츠 베켄바워)

1972년 유럽 축구선수권대회가 개막하고 독일 국가대표팀이 소집 되었을 때, 바이에른 뮌헨 선수는 6명,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선수는 7명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슈투트가르트, 샬케, 쾰른, 뒤스부르크, 오펜바흐 각각 1명)

감독 헬무트 쇤은 이 때의 대표팀에 대해 말했다.


"나는 보루시아의 속도와 바바리아의 지능을 결합시켰다"



웸블리 반란군의 결성과 람바참바의 탄생


독일이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조별예선까지 치룬 이후 1972년 1월, 취리히에서 8강 대진표가 정해졌는데,

독일의 상대는 66년 월드컵과 70년 월드컵에서 만났었던 '앙숙' 잉글랜드였다.

헬무트 쇤은 또 다시 메이저 대회에서 알프 램지와 승부를 겨뤄야만 했다.


"잉글랜드, 웸블리, 더 나쁜게 있나?"


잉글랜드와의 대결이 정해지자 독일 언론들은 비관적인 기사를 쏟아냈는데, 이유는 딱 하나.

성지 웸블리로 원정 경기를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로는 4강에 진출한 나라 4개국이 개최국에 모여 경기를 치뤘고, 8강까지는 최종 예선으로 분류하여 홈-원정으로 나뉘어 2경기를 치뤄야 했다.

잉글랜드의 웸블리는 독일에게 있어 가장 최악인 66 월드컵의 기억이 머무르던 장소였다.

7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 장소는 멕시코에서였지 웸블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때 독일은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나 이긴 경기가 단 한경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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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들의 만남 : 바비 무어와 프란츠 베켄바워)

"프란츠, 우리가 한 5골보다 적게 내주고 경기를 끝내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겠지"

- 경기 시작전 네처와 베켄바워의 대화


1972년 4월 29일 저녁 7시 45분,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됬다. 

웸블리에 모인 9만 6천여명의 관중 중 독일 관중은 1만 2천여명 정도였다.

1분이 지나기도 전에 독일 진영에서 베켄바워가 패스 미스를 저질러 큰 위기를 초래하고 독일 선수들은 골대 앞에서 당황하며 우왕좌왕거렸다.

제프 마이어의 냉정한 판단력이 없었다면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골을 허용했을 수도 있는 불안한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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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울하고 불안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독일 선수들은 계속해서 볼을 많이 다루며 전반전내내 경기를 지배해 나가기 시작했다.

원정이라고 허둥지둥 거리며 볼을 걷어내는 모습은 없었고 차근차근 볼을 다루며 조직적인 패스 플레이로 공격을 주도해나갔다.

전반전에 잉글랜드는 공을 거의 만져보지도 못했고, 독일이 압도적으로 경기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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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26분, 왼쪽에서 지그프리드 헬트의 크로스가 차단 당하고 공격에 실패하자 문전 앞에 머물고 있었던 

헤르베르트 비머와 함께 곧바로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하여 잉글랜드의 문전 앞에서 볼을 빼앗아 왔다.

이를 게르트 뮐러가 받아 헬트에게 패스를 줬고, 헬트가 이를 받아 다시 회네스에게 패스를 해주면서 회네스가 강렬한 슛으로 선제골을 기록한다.


전반전은 1:0으로 종료되었지만 후반전이 시작되자 경기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시종일관 경기를 지배했던 독일은 볼을 만지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수비를 하는 장면이 더 많아졌고, 잉글랜드의 선수들이 세차게 몰아부치기 시작했다.

경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양상을 띄게 되었고 중계 카메라는 왔다 갔다 하는 공을 따라잡기 바빴다.


후반 77분,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잉글랜드의 콜린 벨이 강렬한 슈팅을 날리고,

독일의 골키퍼 제프 마이어가 이를 가까스로 선방하지만 잉글랜드의 프란시스 리가 좋은 위치선정으로 리바운드 볼을 받아 슛을 날려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85분, 잉글랜드의 공격을 막아내고 문전 앞에서 볼을 받은 게르트 뮐러가 하프라인까지 드리블 해가며 역습을 주도했고, 왼쪽 측면에서 달려나가던 헬트에게 패스를 내줬다.

헬트는 잉글랜드 수비수들을 완전히 제치고 박스 안까지 드리블 해가며 슈팅을 날릴 수 있는 찬스를 맞이하는데,

돌파를 허용한 잉글랜드의 캡틴 바비 무어가 백태클로 이를 저지하려다 헬트의 다리를 걸어버려 파울이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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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의 치명적 실수)


이후 주어진 PK를 귄터 네처가 골로 연결하여 독일이 2:1의 스코어로 다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후 또다시 공방전을 주고 받던 중, 2번째 골로부터 겨우 3분이 지나지 않은 후반 8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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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트가 전방 압박으로 잉글랜드 진영에서 볼을 다시 빼앗아 오고,

회네스가 이를 받아 오른쪽 측면에서부터 컷인 해가며 중앙의 뮐러에게 멋진 패스를 줬다.

그리고 게르트 뮐러가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 골을 성공시키면서 스코어 3:1로 독일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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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원정에서 처음으로 이긴 독일, 2011년 빌트지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http://de.wikipedia.org/wiki/Wembley-Elf_(1972)]


당시 경기를 관람했던 피파 6대 회장 스탠리 라우스 경은 이런 말을 남겼다


"1953년 헝가리 선수들이 다시 웸블리에 온 줄 알았어" 


귄터 네처는 99번의 볼터치와 88번의 공격 시도, 64번의 패스 성공, 양팀 통틀어 최대 수치를 기록하며 공격을 주도한 선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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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 또한 공격적으로 뛰어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 때 경기에서 독일의 시스템은 매우 독특했는데, 예를 들어 브라이트너는 왼쪽 측면 수비수였지만 오른쪽에도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는 오른쪽 측면 수비수가 원래는 묀헨글라드바흐의 베르티 포그츠였는데 부상당해 경기에 뛰질 못했고, 이 자리를 브레멘의 디터 회트게스가 대신 했었기 때문이다.

경기 전 쇤 감독은 회트게스에게 요구했다.


"절대로 허스트를 놓치지 마라"


회트게스는 공격적인 면보다 수비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측면에서 뛰어나가는 일이 적었고, '황제의 경호원' 슈바르첸백과 함께 카이저의 뒷공간을 같이 커버하는 임무가 많았다.


중앙 미드필더인 회네스와 비머는 측면에서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때때로 게르트 뮐러는 매우 아래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독일 선수들의 포지션 체인지는 매우 자유로웠던 팀이었는데 이걸 통제했던 2명의 게임 메이커들이 네처와 베켄바워다.

또 재미있게도 네처의 PK 골을 제외하면 2골 다 전부 전방압박으로 상대 진영에서 볼을 빼앗아 기록한 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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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에서의 적극적 빌드업, 조직적인 패스 플레이, 포지션 체인지, 적극적인 전방 압박 시도들은 2년 뒤 1974 월드컵에서 두각을 드러낸 미헬스의 네덜란드 대표팀과 매우 닮았다.

4강전 독일과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뛰었던 파울 반 힘스트 또한 두 팀이 유사하다고 말한적이 있으며,
(http://www.bbc.com/sport/0/football/17981959)

과르디올라의 멘토로 유명한 스페인의 후안마 리요 또한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를 언급하면서 토탈 풋볼과 1972년 독일과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http://www.marca.com/2012/12/16/en/football/barcelona/1355685974.html)


이후 베를린에서 열린 2차전에서 0-0 무승부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독일이 유로 본선 무대에 가게 되었고,

4강 전에서 개최국 벨기에를 2-1로 꺽고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아쉽게도 이 4강전은 녹화된 필름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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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무대인 벨기에 헤이젤 경기장에서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3:0의 완벽한 경기를 보여주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기록한 뮐러의 첫번째 골이 터지기 직전 상황에 베켄바워와 뮐러, 네처가 아주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이 직후 볼이 문전 앞에 떨어진걸 하인케스가 슛, 골대를 맞고 나온 공이 '항상 올바른 위치에 있는' 뮐러 코앞에 떨어지면서 뮐러가 침착하게 선제골을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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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골은 하인케스가 박스 아래로 내려와 만들어낸 공간을 중앙 미드필더인 비머가 침투하면서 기록해냈다.

'9번'을 달고 있는 하인케스가 미드필더처럼 내려와 패스를 내줬고, '6번'을 달고 있는 비머가 공격수처럼 달려가 골을 넣은 장면이었다.

이런 포지션 체인지는 세번째 골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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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골에서 역습을 주도한 '4번'은 카이저의 경호원이자 수비적인 임무가 더 많았던 슈바르첸백이었다.

뮐러-하인케스-슈바르첸백-뮐러로 이어지는 3번째 골과 위의 2번째 골은 이 당시 독일 대표팀의 포지션 체인지와 조직적인 

플레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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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직전 상황, 아래까지 내려와있는 관객들)

"독일이 유럽의 왕이다!(Deutschland ist Europas Konig)" - 키커(Kicker)

"2000년대에서나 볼 수 있는 꿈의 축구" - 프랑스 르퀴프(L'Equipe)

"독일이 축구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 이탈리아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흉내낼 수 없어 보였던 헝가리의 화려한 축구를 유럽에서 다시 보여준 독일에게 감사한다" - 잉글랜드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

(http://www.dfb.de/index.php?id=511868)
(http://www.dfb.de/news/de/d-nationalmannschaft/zur-ersten-seite/32784.html)
(http://bit.ly/1gwcB2Y)


대회가 끝난 뒤 유럽 언론들은 앞다투어 독일을 칭송했다. 쓰여진 표현만 보더라도 마치 브라질과 같은 팀을 찬양하는 듯한 표현들이다.

결승전의 상대였던 소련의 감독은 '이런 팀에게 지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라고 말하며 우승 팀에게 경의를 표했다.

독일 언론들은 대회 동안 보여준 72 대표팀의 축구를 '람바참바 풋볼(RambaZamba Fussball)' 이라 불렀는데, 

람바참바는 브라질의 삼바에서 따온 말로, 독일에서 춤추며 흥겨울 때 쓰는 의성어다.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럴 땐 '혼잡한 상황'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당시 사람들은 이 때의 독일의 축구를 보며 브라질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1972년 발롱도르 투표에선 독일의 3명의 선수들이 전부 다 휩쓸어갔으며,
(1위 프란츠 베켄바워, 공동 2위 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

이 때를 경험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귄터 네처는 물론이거니와 제프 마이어도 72 대표팀이 역사상 최고라고 말했고,
(http://www.welt.de/print/wams/sport/article107256053/Wir-waren-damals-eine-Traummannschaft.html)

독일 국가대표로 수많은 메이저대회에 참여했던 베켄바워 또한 72 대표팀을 최고의 팀으로 뽑았다.
(http://kr.uefa.com/uefaeuro/finals/history/memories/newsid=1782293.html)


이 대표팀은 그야말로 유럽에서 먼저 칭송받은 독일의 첫 대표팀이었다.

72년 이전 독일은 54년 월드컵 트로피가 있었지만 당대 유럽 언론들은 최고 팀이었던 헝가리가 트로피를 빼앗겼다 여겼었고, 지금까지도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곤 하다.

독일에선 '기적'이라 말했지만 외국의 언론들은 독일의 축구를 폄하했고 독일 축구에 편견으로 가득한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일조한 이들이었다. 

때문에 독일내에서 72 대표팀을 이야기 할 때 이런식으로도 말한다


"독일 축구에 대한 고정관념과 모순을 바로 잡은 대표팀"
(http://www.neues-deutschland.de/artikel/219733.gruen-ist-die-hoffnung.html)



드림팀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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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1974년 월드컵에서도 독일은 우승컵을 들어올렸지만, 대회 최고의 팀이라 이야기 됬던건 준우승 팀인 네덜란드였다.

베켄바워는 월드컵에서 우승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롱도르를 들어올리지 못했고 후대에 들어서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회자된 팀도 명백히 패배한 크루이프와 네덜란드였다.


이 대회에서 귄터 네처를 제치고 중원의 주역을 맡은 볼프강 오버라트의 발탁을 두고 어떤 이들은 헬무트 쇤이 창조성보다 운동량을 더 택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당시 사정을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1970년 11월 18일,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열린 독일의 친선 경기에서 헬무트 쇤은 베켄바워와 네처, 오버라트를 전부 다 선발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해당 경기에선 2-0으로 패배했지만 헬무트 쇤은 당대 독일에서 가장 창조성이 넘쳤던 3명의 재능들이 공존하길 누구보다 바라는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4일 뒤인 22일에 열린 그리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또한 3명의 선수들이 공존했는데 이 경기는 3-1로 승리했지만, 오버라트는 전반 35분 부상으로 교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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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서 전반 30분, 첫번째 골을 넣은 네처에게 패스를 주기까지 공격 작업을 주도한 선수는 오버라트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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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74분 세번째 골을 넣은 베켄바워에게 라스트 패스를 절묘하게 넣어준 선수는 네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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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국가대표에 소집된 독일 최고의 재능들. 베켄바워, 네처, 오버라트)

헬무트 쇤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 3명의 공존 테스트를 거쳤다.

1971년 2월 17일, 6월 12일 알바니아와의 유로 조별예선 경기

6월 22일 노르웨이, 6월 27일 스웨덴, 6월 30일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

11월 17일 폴란드와의 유로 조별예선 경기 등...

하지만 1972년에 들어서 볼프강 오버라트가 사타구니 부상을 당해 대표팀에서 이탈하면서 공존은 불가능해졌다.


72 유로가 끝난 뒤 오버라트가 부상에서 복귀하자 이번엔 네처가 말썽이었다.

73년 네처는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는데 이적하기 전에도 잦은 부상에 시달리던 선수였고, 새로운 무대에서의 적응기는 그를 계속해서 부상에 시달리게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유로에서의 성공은 네처를 유럽의 스타로 만들었지만 미디어의 관심은 동시에 그를 교만에 빠지게 만들었고,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로써 해야하는 성실한 트레이닝을 하지 않고 그는 사업가들과 어울리며 돈을 버는 것에 치중했다.

결국 이런 자기 관리의 실패로 74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 네처의 몸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http://www.berliner-zeitung.de/newsticker/guenter-netzer-sieht-das-ende-der-grossen-spielmacher-mit-der-nummer-10-voraus-aussterbende-vagabunden-im-koenigstrikot,10917074,9440150.html)


"내가 감독이었어도 날 쓰지 않았을거다. 그 정도로 내 몸 상태는 엉망이었으니까"


1974년 2월 26일, 독일이 로마에서 이탈리아와의 친선 경기를 가졌을 때가 베켄바워-네처-오버라트가 공존한 마지막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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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독일의 만남,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와 동독의 베른트 브란슈)

월드컵이 시작되고 6월 22일, 함부르크의 폴크스바르크 슈타디온에서 동독일과의 경기가 열렸다.

분단 국가들이 붙게 됬던 이 경기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고, 헬무트 쇤은 "이것은 단지 스포츠일뿐이다" 라며 격앙된 분위기를 일축하려 했다.

경기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중 후반전, 관객들이 "귄터! 귄터! 귄터!" 라 외치며 네처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후반 69분, 선발 출장했던 오버라트가 벤치로 나가고 네처가 교체되어 들어왔다.

하지만 네처가 나온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동독이 역습으로 골을 성공시켰고 경기는 1:0 동독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이 때 네처가 출장한 21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유일한 월드컵 출장 기록이 되었다.


이후 76 유로가 열렸을 때는 네처도, 오버라트도 없었으며 오직 베켄바워뿐이었다.

1977년 2월 23일,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카이저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당대 최고의 재능들은 국가대표를 떠났고, 드림팀은 해체되었다.




위선자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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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가 독일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많은 독일인들이 탄식했다.


"베켄바워, 네처, 오버라트와 같은 재능들은 어디로 갔는가!"


네처의 후계자가 될거라 믿었던 베른트 슈스터는 82년 국가대표 소집을 거부했고, 84년 감독이 된 카이저의 부름조차 거절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당시 분데스리가의 감독들이 지나치게 개인의 창조성을 억제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예로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는 드리블을 너무 많이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벌금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드리블을 자주 시도했다고 지적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을지 몰라도 벌금 징계를 받는 경우는 없다.

당시 독일 축구계의 풍토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시사하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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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독일의 명드리블러이자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선수였던 리트바르스키, 그가 가장 동경했던 선수는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였다)
[http://www.fifa.com/classicfootball/players/do-you-remember/newsid=950285/index.html]


1986년 8월 11일, 슈피겔 지는 개인의 창조성과 독창성을 억제하고 젊은 선수의 발전을 막고 있는 장본인들은 감독들이면서,

동시에 개인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의 부재를 한탄하고 있다며 신랄한 비판이 담긴 기사를 실었다.


"독일 축구엔 위선자들이 너무 많다!"

(http://www.spiegel.de/spiegel/print/d-135190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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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독일이 3번째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때 감독인 베켄바워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팀은 향후 몇 년동안 무적의 팀이 될 것이다"


2년 뒤 유로에서 준우승을 거둘 때만 해도 그 말은 사실인 것 처럼 보였지만, 94년 월드컵에서 '무적의 팀'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 때부터 독일 내부에선 불안감과 경각심에 찬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위에서 슈피겔 지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미 80년대 중반서부터 창조성과 독창성을 억제하고 젊은 선수를 키워내지 못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있었다.

하지만 1990년 독일에서 있었던 중대한 사건이 이런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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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갈라져있었던 독일은 통일 되었고, 동독일에 있던 사람들은 서독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 때 사람들은 동독일의 유능한 재능들이 건너와 하나된 독일의 축구계를 발전시킬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유로 96에서 동독 출신의 마티아스 잠머가 활약하며 유로 3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니 분명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생각이기도 했다.

독일 축구계가 이걸 깨닫게 되는데는 98 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의 참패를 목격하면서였다.


2000년 6월 20일 유로 2000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서 독일은 포르투갈에게 3-0으로 패배하면서 문자 그대로 분쇄되었다.

웃기게도 10년전, 무적의 팀 선언을 했던 베켄바워는 이 경기를 보고 불평을 쏟아내며 비난했다.


"이건 형편없는 Rumpelfussball 이야"


rumpel은 영어 단어 rumble에서 따온 말로 '덜컹덜컹 거린다'라는 의성어다.

베켄바워가 했던 이 말은 2001년도에 독일의 창조적인 신조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http://bit.ly/1fE3W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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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유로 2000에서의 실패 이후 독일 언론 BZ-berlin이 이를 지적했다.


"우리 아이들은 보고 배울 우상이 없어요"
(http://www.dfb.de/index.php?id=511926)

실제로 현재 독일을 이끌고 있는 세대들은 독일 선수가 아니라 다른 국가의 선수들을 우상으로 삼으며 자라왔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프랑스의 에릭 칸토나와 지네딘 지단이 우상이었고, 메수트 외질, 마리오 괴체 또한 지단을 동경했으며, 마르코 로이스에겐 토마스 로시츠키가 우상이었다


그제서야 독일내에선 10여년 전의 현실을 외면했던 것이 이러한 사태를 불러일으켰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브라이스가우의 브라질리언, 독일을 강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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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23일, 분데스리가 2라운드에서 폴커 핀케의 프라이부르크는 바이에른 뮌헨을 5:1로 박살내버렸다.

당시 바이언에는 칸, 마테우스, 메멧 숄, 장 피에르 파팽 등 뛰어난 선수들이 선발출장했던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난 프라이부르크 선수들이 13명, 14명인지 알았어"

- 경기가 끝난 이후 마테우스의 인터뷰


94/95 시즌 폴커 핀케는 프라이부르크를 클럽 최고 성적인 3위로 이끌었고, 이 때 우승팀인 도르트문트와의 승점은 겨우 3점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독일 언론들은 프라이부르크를 가리켜 '브라이스가우의 브라질리언(Breisgau-Brasilianer)' 이라 불렀다.

폴커 핀케는 개인기량을 조직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 믿었고, 이를 프라이부르크라는 2부리그에서 승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클럽을 이끌고 증명해냈다.

그는 항상 선수들에게 공격적으로 임할 것을 주문했고 패스 컴비네이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패스 축구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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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Finke!)

이후 핀케의 철학은 독일내 젊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랄프 랑닉, 요아힘 뢰브 등이 그런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오늘날 독일의 현대 축구를 이야기 할 때 그는 절대로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 되었고, 

현재 활약하고 있는 위르겐 클롭과 토마스 투헬 같은 젊은 감독들의 아버지(Urvater)라 불릴 정도다.

(http://www.ksta.de/fussball/volker-finke-anarchist-unter-grasfressern,15189340,12597510.html)


핀케는 독일 축구의 3백 리베로 시스템에 종말을 고한 감독으로 알려져있지만, 

그가 진짜로 종말을 고한건 개인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억제하는 축구였지 리베로 시스템이 아니였다.

핀케는 1972년 람바참바 대표팀을 언급하면서 당시의 대표팀이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http://www.taz.de/!20007/)


또한 2008년 유로가 끝나고 비스바덴에서 열린 독일 국제 코치 회의(ITK, Internationaler Trainer-Kongress)에서 

독일이 1950년대 헝가리, 1960년대 브라질, 1972년의 독일 대표팀과 같은 공격적인 축구를 해야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http://www.dfb.de/index.php?id=511739&tx_dfbnews_pi1[showUid]=15238)



람바참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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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이 아르헨티나를 4:0으로 이겼을 때, 

덴마크 언론 "Fyens Stiftstidende"에선 '네처와 베켄바워의 72년 대표팀 이후 최고의 독일 팀!' 이라는 헤드라인을 작성했고, 

독일 언론들은 이를 인용하면서 '드림팀이 다시 결성되는가?' 라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최고의 팀은 뢰브의 표현을 빌려 '영웅들'을 데리고 축구를 한 스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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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성공 스토리의 서막, 2012 : 새로운 장을 기록한다)


2년 뒤, 유로 2012가 열릴 때, 독일에서는 72 유로 우승 40주년을 기념해 

유로 2012에서 다시 한번 드림팀이 재결성되길 희망하는 마음을 담아 웸블리에서 원정 첫 승리를 거뒀던 그 때의 어웨이 유니폼을 리메이크 했다.

그러나 이전 독일 대표팀들도 넘지 못했던 천적 이탈리아에게 또 패배하면서 독일은 이번에도 '무적함대' 스페인이 메이저 대회 3연패라는 불멸의 기록을 작성하는 것을 구경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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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키타카가 아니야! 람바참바라고!) 
2013-14 시즌 챔피언스 리그 아스날과 바이언과의 16강 1차전에서 가디언 지는 문자 중계로 72 대표팀을 소개하면서 티키타카를 대신해 람바참바를 썼다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2014/feb/19/arsenal-v-bayern-munich-live-champions-league-report]


당시 드림팀의 주역이었던 귄터 네처는 자신의 후대격인 선수들이 반드시 72 대표팀을 뛰어넘는 축구를 구사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유로 2012가 열릴 때도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그렇다.

2014년 월드컵이 열리는 곳은 람바참바의 어원인 삼바의 나라 브라질이다.

과연 삼바의 나라에서 독일은 꿈의 람바참바를 다시 연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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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우상들(Idole eines Zeitalters)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프란츠 베켄바워, 헬무트 쇤 감독, 한스 게오르그 슈바르첸백, 유프 하인케스, 게르트 뮐러, 디터 회트게스, 귄터 네처, 울리 회네스, 제프 마이어, 파울 브라이트너, 헤르베르트 비머, 에르빈 크레머스]




좋은 글 같아서 퍼왔습니다 ㅎㅎ 2014년 월드컵 들어야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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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십 드르미치를 노리는 분데스리가 팀. (by 불꽃싸다구) 국내선수지만 정말 좀 너무하긴 한듯합니다. (by 불꽃싸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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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개인적으로 이번 월드컵 로이스에 기대를 해봅니다.
  • 1. 오베라트-네처의 공존 시도는 유로72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유로68 지역예선이었는데 알바니아에게 비기면서 탈락하는 대참사가 일어나죠. 당시 조 1위는 유고슬라비아였는데, 서독이 알바니아에게 승리를 거뒀으면 골득실 때문에 조 1위로 8강전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유로68은 독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선 진출에 실패한 메이저대회입니다.

    2. 저 웸블리 경기가 있기 전까지 독일과 잉글랜드의 상대전적은 2승 2무 10패로 압도적인 독일의 열세였으며, 특히 그 유명한 1966월드컵의 결승전이 끝난 직후에는 2무 10패였습니다. 이 웸블리 경기는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전경기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72년 본선과는 멤버가 조금 다르긴 한데 아무튼 꽤 재밌습니다.

    3. 네처가 벤치에 앉은 건 헬무트 란 감독과 베켄바우어의 면담이 컸다고 하죠. 네처와 베켄바우어의 불화는 꽤 유명한 일인데 여기서 베켄바우어가 오베라트를 선택함으로써 네처가 밀려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두 사람의 공존은 수년째 이룰 수 없는 꿈이었고, 결과적으로 오베라트는 본선에서 대활약을 하면서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니 네처로서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요. 네처와 베켄바우어가 갈라지게 된 이유는 베켄바우어가 네처의 프리킥을 대신 차서 골을 넣었기 때문이라는데 이건 유로72 이전의 일이라 유로72 이후 갈라섰다는 통설과는 어긋납니다. 뭐, 네처가 옛날 일이고 하니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죠. 아니면 유로72때 이미 사이 나빴는데 두 사람의 천재성으로 극복했든가요.

    4. 슈스터가 나치오날엘프를 포기한 이유는 브라이트너 때문이라고 하죠.
  • 2014.4.19 12:05 댓글추천 0비추천 0
    네처가 74때 주전으로 못뛰었군요 ㄷㄷㄷ..
    천재 플메라고 들었는데
  • 흥미로운 글이네요.. ㅎㅎ 네처와 오버라트에 대해서는 여과되지 않은 편견들이 많고, 그래서 저조차도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헷깔릴 때가 많은데, 본문과 댓글에서 많이 배워가네요..
    개인적으로 오버라트보다 네처를 더 높게 평가하지만(사실 많은 분들이 그럴 듯;;), 일부 사람들의 헛소리들과는 달리 74년도에는 오버라트가 나가는 게 백번 옳았죠. 그 때문에 비록 네처가 비운의 천재라는 말을 듣기는 해도..
    그리고 슈스터가 대표팀을 포기한 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메롱나라님께
    불꽃싸다구글쓴이
    2014.4.19 21:44 댓글추천 0비추천 0
    저도 이 본문글을 읽어보고 정말 많이 배웠어요. 진짜 독일에선 천재형의 선수들이 많이 빛을 못본듯하네요..
    귄터 네처, 베른트 슈스터,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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