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시간, 인내, 정숙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 칼 하인츠 루메니게
우리에게는 정숙이 필요하다 - 마티아스 잠머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 펩 과르디올라
5. 첫 훈련 2013년 6월 26일 뮌헨
만약, 펩이 전쟁에 나서야만 한다면, 가장 먼저 소집되는 것은 로렌소 부에나벤투라다. 부에나벤투라는 애초에 부지런한 사람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하지 않는다. 저녁에 훈련계획의 최종수정을 위해 매우 빠른 시간에 펩과 아침식사 약속을 했다. 이것으로 6월 26일,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개최된 훈련 첫 날의 계획은 완벽하다.
펩은 뉴욕에서, 부에나벤투라는 스페인 카디스에서 부임하기 전까지 의견 교환을 해가며 7일간의 훈련계획을 작성해왔다.분데스리가가 시작되는 8월 9일 금요일까지 3번의 공식전을 포함해 13경기를 치른다. 그 속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독일 슈퍼컵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3년 5월 14일, 펩은 처음으로 7주간의 계획에 관한 개요를 5줄의 메모로 스태프들에게 전했다. 내용은 매우 간단. 독일 슈퍼컵에 맞춰 경쟁력을 높이는 것, 분데스리가를 좋은 컨디션으로 시작하는 것, 이탈리아에서의 캠프도 포함된 독일어와 카탈루냐어로 이루어진 간략한 문서였다. 바르셀로나 시절에 계속 대처해왔던 미국과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힘든 프리시즌 투어와 인연이 없었던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부에나벤투라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 새로운 바이에른의 체력코치로서 그는 45일 동안의 훈련, 그 중 12일간은 오전과 오후의 2단계를 편성했다. 바르셀로나 시절에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이곳은 훈련과 경기를 반복하면서 약 60번의 세션을 단 7주 동안 실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사다망한 빅클럽에게 있어서는 극도로 사치스러운 이야기이며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부에나벤투라는 영어도 독일어도 구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이에른의 사람들 사이에서 순조롭게 일한다. 스승은 육상경기출신이자 축구와 팀 스포츠의 체력훈련 학교를 만든 파코 세이룰로.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에서 그 메리트를 실천해서 25년의 긴 세월에 걸쳐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체력을 만들어왔다. 그의 성공은 주지하는 대로. 세이룰로에게서 3~5일이라는 짧은 사이클의 훈련을 짜는 메리트를 배웠다. 여기서 말하는 체력이란 각 선수에게 적합한 지구력, 단거리 능력 또는 순발력을 가리킨다. 다음 경기에 초점을 맞춘 ‘전술테크닉’과 컨디션을 가정하면서 항상 볼과 함께 체력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다.마치 경기를 하는 것처럼 훈련을 한다. 훈련의 모든 순간에 펩이 지시하는 플레이의 원칙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각각의 훈련과정은 펩과 부에나벤투라가 정한 ‘전술 테크닉’의 특정 목적이 우선시된다. 예를 들면 어떤 날에는 사이더 데 발롱(빌드업의 시작). 다른 날은 볼을 잃은 뒤에 압박을 거는 방식이다. 새로운 바이에른에서 펩의 훈련은 감독도 선수도 아닌 볼이 주역이다. 루메니게는「지금 당장이라도 펩이 팀을 어떻게 바꿀지 훈련을 보고 싶다」라며 호기심을 보였다. 마티아스 잠머는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들이 펩을 알고, 펩이 우리들을 알 때가 왔다. 가능한 서로 겸허하게 함께 일할 때이다」
루메니게와 잠머, 선수들에게 있어 첫 훈련은 놀라웠음에 틀림없다. 장거리달리기와 1000미터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근육 트레이닝 코스 등 육상경기 같은 시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웨스틴 그랜드 뮌헨 호텔에서의 아침식사 이후 7시 30분에는 호텔을 나왔다. 훈련은 저녁까지였지만 메디컬 체크를 하러 온 선수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펩들이 알리안츠 아레나에 도착했을 때 하인케스의 뒤를 이은 베테랑 코치들도 막 도착했다. 도메넥과 함께 세컨드 코치를 맡을 헤어만 게를란트, 2011년에 골키퍼 노이어와 바이에른에 온 골키퍼 코치 토니 타팔로비치, 그리고 부에나벤투라의 밑에서 일하는 체력코치 안드레아스 콘마여와 토마스 윌헬미가 그곳에 있었다.
오후 4시, 체력코치진은 알리안츠 아레나의 피치로 내려와서 훈련 준비를 시작했다. 3명의 유스 선수들도 세션의 시범을 보이는 역할을 맡았다. 홍수피해를 위한 모금으로 1명당 5유로의 입장료를 받았지만 7천명 가까운 팬이 모였다.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가장 가까운 플랫매닝역이 보수 중이었기 때문에 아르테 하이데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여정은 길다. 지하철 속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매우 떠들썩한 지중해에서 온 사람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때로는 누군가 그 정적을 깨고 휴대전화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속삭이는 소리에 그쳤다.
하지만 이 정적이 경기가 있는 날에는 시끌시끌하게 변한다. 지하철과 버스 차량은 팬의 기대와 기쁨의 목소리로 넘친다. 상대팀 팬들의 목소리도 뒤섞여서 지하철 여행은 어느새 응원가 경연대회로 변한다.
그래서 오후 5시 1분 전, 20명 정도의 선수들이(2군 선수들이 대부분이지만) 피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펩은 시즌의 목표와 향후 일정 등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선수 대부분이 부재한 것이 이유다. 하비, 단테, 루이스 구스타부는 7월 15일까지 오지 않는다. 아리옌 로벤, 알라바, 마리오 만주키치, 세르당 샤키리, 다니엘 반 부이텐, 클라우디오 피사로 등은 1주일 뒤인 이탈리아 합숙부터 합류한다. 부상자인 마리오 괴체,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도, 지난 시즌부터 이탈중인 홀거 바트슈투버도 없다. 너무 긴 연설을 피해서 센터서클 안에서 짧게 말했을 뿐이다.
「1가지 요구가 있다. 뛰어. 플레이와 패스의 실수는 OK. 하지만 뛰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만약 그걸 어긴다면 여기서 나가게 될 거야」
그에게 있어 진짜 사무실인 피치로 돌아왔다. 398일만의 훈련. 이렇게 펩다운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은 워밍업부터. 8명씩 3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각각 원 위의 6명이 최고의 스피드로 패스를 돌리고 안에 있는 2명이 볼을 빼앗는다. 어렸을 때부터 실시하는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에 비해 흐름이 매우 좋지 않다. 유럽 챔피언들은 론도에 관해서는 서툴렀다. 펩은 엉겁결에 머리를 긁었다. 한편 선수들은 육상경기 같은 연습을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볼과 만나버렸다.
정면 스탠드 아래의 관중석에는 팬들로 가득 찼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원래 독일의 축구팬들은 매우 떠들썩하다. 경기 당일에는 이 현대적인 대성당은 노래로 가득 찬다. 하지만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는 주역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용히 견학하는듯하다.
8분간의 론도를 2번, 몇 차례 볼을 사용한 움직임. 항상 볼을 다루면서 워밍업은 지나갔다. 그리고, 3개의 선을 사용한 지구력 훈련에서 펩과 부에나벤투라는 수정을 위해 몇 번이나 중단해야만 했었다. 선수들은 이해하는데 고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몇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르디올라는 걱정하듯이 머리를 긁었다.
3개의 라인 훈련에 관해 부에나벤투라가 설명해줬다.
「70미터의 라인을 왔다 갔다 하면서 2개의 리듬으로 뛰는 지구력 훈련이야. 갈 때는 3개의 ‘전술 테크닉’을 실천하기 때문에 느린 리듬으로 해야해. 돌아올 때는 그저 달릴 뿐. 모두 약 6분간 실시. 왕복 150m지만 4km를 달리는 것과 같은 부하가 걸릴거야. 그저 달리기만하는 것이 아닌 지구력 훈련이고, 이후의 게임 형식의 훈련과도 이어지도록 연결되는 연습을 도입하고 있지. 가는 길에는 펩의 플레이철학이 들어있어. 첫 번째는 제3의 움직임을 사용해서 정면을 바라보며 패스를 받고 두 번째는 2X1. 3번째는 콘 사이를 통과하는 패스. 첫 번째 콘셉트에서는 3명의 선수가 협력하고, 2 번째와 3 번째는 혼자서 하게돼. 그들에게 있어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지구력 훈련이라고 할까. 작년까지 했던 800~1,000m의 질주 대신에 볼, 연계, 플레이의 콘셉트를 도입한 거지」
벤치에는 6월 3일에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고 재활중인 슈바인슈타이거가 잠머와 함께 앉아있다. 처음에는 10일이면 회복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지만 2배 이상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훈련에 복귀하지 못했다. 바트슈투버와 괴체는 스탠드에서 동료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바트슈투버는 도르트문트 전에서 부상당한 오른쪽 무릎 전방십자인대 수술을 받았지만 5월에 재발, 9월에 재수술 예정이다. 옆에 앉아 있는 괴체는 4월 30일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레알 마드리드 전에서 햄스트링 부상. 결승전에 출전하고자 재활에 무리를 해서 재발. 2개월에 걸쳐 이탈하게 되었다. 이 3가지 부상이 가장 긴 경우다. 펩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피치 위에는 부에나벤투라가 지휘하는 볼을 사용한 지구력 기본연습이 끝났다. 2군의 어린 선수들은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달렸고, 축구선수로서의 부족함을 느꼈지만 아마 10번 정도 훈련을 마쳤을 때는 더 나아질 것이다.
4번째는 4분간의 포지션플레이 연습. ‘콘세르바시오네스’라는 이름이 붙은 세션이다. 펩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세션이 된다.직사각형 구역 안에 삼각형 형태의 3명의 자유로운 선수와 4명의 수비수가 들어간다. 주변에 4명의 선수가 위치하고 볼을 잃지 않도록 패스를 계속 돌린다. 볼은 원터치로 넘겨줘야 한다. 펩은 몇 번이나「압박해, 압박해!」라고 강하게 외쳤다. 볼을 빠르게 돌리면서 볼을 빼앗겼을 때는 강한 압박을 건다. 이것이 가장 바이에른에게 주입하고 싶어 했던 팀의 인상인 것이다.
이 세션은 2명의 선수에게 빈번하게 지시가 날아갔다. 처음에는 토니 크로스. 꾸준하게 물 흐르듯 패스를 돌리기 위한 방향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다음을 생각해서 패스를 보냄으로써, 항상 자신보다 앞에 있는 동료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가능해진다. 선수시절의 펩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기본이었다. 바이에른 축구의 미래의 지도자가 될 크로스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단순히 패스를 하는 게 아니라 의도를 갖고 패스를 하고 다음 동작을 위해 즉시 자리를 잡는다. 그것이 팀 동료에게 다음 플레이의 선택지를 제공한다. 이니에스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의 패스를 통해 동료가 패스를 계속 연결할 수 있다는 점.스스로(골문 근처의 압박이 강한 장소에서)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어 지원하면서, 멈추지 않도록 계속 볼을 움직이게 만든다.이니에스타가 있는 팀은 항상 경기를 주도하고 지배할 수 있다. 패스의 순환을 위해 때로는 움직이면서, 때로는 적절한 자리에 머무른다. 이 패스는 어떤 도움이 될지, 보내기 전에 생각한다…….
하지만 크로스에게 있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 연습 때는 펩의 가르침을 거의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지시가 날아간 것이 잘 훈련하면 미지의 재능이 발휘될 제롬 보아텡. 수비라인을 유지하고, 상대 공격수를 맞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주도하는 수비를 하고, 집중력을 잃지 않는 3가지 약점을 개선하는 것이 시즌 목표다. 훈련 첫날부터 펩은 지금까지 팀이 해왔던 위치보다 훨씬 높은 지점에 수비라인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후방이 아닌 보다 높은 위치에서 스피드와 적극성과 대범함을 갖고 수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비 마르티네스가 부재한 현재 보아텡의 성장이 바이에른의 퍼포먼스의 핵심이 될 것이다.
집중해서 ‘전술 테크닉’을 추구한 80분간의 훈련이 끝났다. 이렇게 다음 경기를 위한 전술을 설정하고 항상 100%의 힘으로 임하는 약 1시간 30분의 훈련은 시즌 마지막까지 계속될 것이다. 펩은 그 뒤 2명의 선수와 단독으로 면담을 했다. 첫 번째는2013년 4월에 17세의 나이로 1군에서 데뷔한 미드필더 피에르 에밀 호이베르그다. 다이아몬드 원석과도 같은 덴마크의 소년을 첫 세션부터 쭉 관찰했다. 훈련을 마친 뒤에는 걸으면서 면담을 했다.
향후 집중해서 강도 높은 4주간의 프리시즌과 긴 정규시즌을 거쳐 조급해하지 말고 축구에 관한 모든 비결을 가칠 생각이다. 펩은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호이베르그에게 경험을 상세하게 전달할 것이다.
두 번째는 리베리. 세션 마지막을 선언하는 스트레칭과 프로프리오 세션의 콤비네이션과 가벼운 복근 도중에 대화를 했다.펩은 리베리의 공격수로서의 재능에 매료되었다. 한편 리베리는 자신의 커리어를 끌어올려줄 펩의 가능성에 반했고, 서로를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의 형태를 완벽하게 발견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펩은 이 때 중앙에서 공격하는 것은 쾌적한지 어떤지를 물었다. 리베리에게 있어 펩이 말하고 싶은 것을 이해하기란 간단하지 않았다.
펩의 이상적인 공격수는 처음부터 에어리어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 동료들의 움직임에 맞물려 이동하면서 에어리어에 도달하는 것이다. 리베리는 그 잠재력을 갖고 있다. 중앙에서 멋진 공격을 할 수 있는 직감이 있었다. 하지만 왼쪽 측면에서의 공격에 익숙한 프랑스인에게는 감독의 말을 뚜렷하게 떠올리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리베리의 중앙에서의 성공,그것을 위한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열정과 상호 공헌을 바탕으로 개척해나갈 것이다.
이렇게「영어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쭉 독일어였다」라고 얀 키르히호프가 말했던 첫 훈련이 끝났다. 이 날에도 마지막에 피치를 떠난 것은 부에나벤투라다. 가장 먼저 피치의 잔디에 발을 딛고, 가장 마지막에 피치를 떠나는 그의 모습은 시즌 마지막 날까지 계속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6. 첫 경기 2013년 6월 29일 바이덴 인 데어 오버팔츠
체코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 바이덴 인 데어 오버팔츠(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주의 도시. 뉘른베르크 동북동 약 80km의 나프 강을 따라 위치한다. 오버팔츠 지방의 중심도시)에서 펩 바이에른의 첫 경기가 열렸다. 6월 29일 정오. 아직 4번의 훈련밖에 실시하지 않았다. 유럽 챔피언의 주력은 이탈리아의 토렌티노에서 시작되는 훈련부터 합류한다. 따라서 1군 선수는 13명뿐, 그 외에는 모두 2군의 전도유망한 선수들이었다.
데뷔전이라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매년 바이에른은 팬클럽(페냐)이 소유한 3600개의 축구팀 가운데 1팀과 경기를 갖는다. 확실히 팬들에게 있어 꿈의 매치다. 올해는 바이덴 바이에른이 뽑혔고 인구 4만1684명 도시의 대사건이 되었다. 전체 시민의 1/4인 1만1000명이 경기장을 채웠다. 펩은 축제 같은 경기라고는 해도 이 경기를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보이는 계기로 삼고자 크게 활용했다. 그것은 원 피보테(One Pivote) 선언이다.
유프 하인케스의 성공 중 하나가 슈바인슈타이거와 하비 마르티네스의 도브레(더블) 피보테였다. 그들의 임무는 짝을 이뤄 등번호 6의 공간을 걸어 잠그거나 상대의 코스를 한정시키는 것. 하인케스의 도브레 피보테는 멋지게 활약하며 트레블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펩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기의 시작부터 그것을 포기했다.
10년 이상이나 선수로서 엘리트였던 펩은 수비라인 앞의 포지션에서 팀을 조율해왔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등번호에서 딴 누메로크와트로(4번), 혹은 피보테라고 불리는 포지션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5번, 독일에서는 6번 혹은 중앙미드필더라고 불리고 있다.
또, 스페인에서는 메디오센트로라고 부르며, 바르셀로나와는 다른 호칭이다. 수비수 및 골키퍼에게서 볼을 받아서 공격을 풀어나간다. 상대의 라스트패스를 차단하거나 역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비 능력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펩의 선수시절의 플레이를 떠올려보면 신체는 가늘고 빈약했으며 그 외에 발도 느려서 수비능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신체적 약점 탓에 2군 경기도 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펩에게 주목했던 것이 크루이프다. 코치였던 카를레스 레사크가 80년대 말에 바르셀로나의 1군 감독 크루이프에게 말했다.「2군에 과르디올라라는 엄청난 선수가 있는데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 한마디에 크루이프는 그 연약한 미드필더를 1군으로 승격시켰다. 펩의 인생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고 등의 4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펩은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이 포지션을 누메로크와트로라고 부르게 된다. 그 뒤 크루이프가 건설 중이었던 드림팀에 빠르게 데뷔했고, 펩의 재능은 10년 이상이나 바르셀로나에서 꾸준히 빛났다.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고 장점을 살리는 것에 전념했던 펩. 달리는 것이 느린 대신 볼을 빠르게 돌린다. 상대와의 접촉 플레이 대신 패스로 상대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견고한 수비 대신 공격했다. 펩의 감독으로서의 편린은 이전부터 엿보였던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두려워하기 전에 이쪽이 공격을 시도한다. 볼을 조종하는 것을 추구하고, 빠른 패스로 적의 수비를 파괴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한 것이다.
2013년 11월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펩은 선수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짧은 말로 말해줬다.
「만약 내가 공격수의 능력과 신체, 속도가 있었다면 11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계속 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펩은 바르셀로나에서 출전한 총 385경기 가운데 겨우 13골밖에 넣지 못했다. 가혹한 축구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장점을 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 축구계에서 매우 드문 사고방식이었다. 패스를 받기 전에 항상 다음 패스를 의식한다.섬세한 기술을 가능하게 만들려는 만큼 체력훈련도 추구했다. 패스로 팀 동료를 도울 수 있는 플레이를 기본으로 한다. 상대를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패스로 수비라인을 넘을 정도로 기쁨에 가득한 공헌은 없었다.
「만약, 내 앞에 5명의 수비가 있다고 하자, 그들은 내게 측면으로 패스를 보내도록 할 거야. 측면에서 측면으로, 깊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패스를. 이 5명 뒤에 있는 4명과의 공간은 촘촘해. 2개의 열은 측면 공간으로 나를 내몰려고 할 테고 위험을 피하려고 하겠지. 그래서 나는 2명의 윙을 깊고 넓게 배치시켜서 다른 공격진을 상대 수비수 사이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었어.그리고 5명의 수비수를 무력화시켰지. 좌우를 흔들고 혼란시켜서 측면으로 갈 것처럼 보이게 만든 순간 쾅! 공격진에게 패스를 넣어주는 거야. 그것으로 끝. 그 때는 이미 공격진이 완벽하게 앞을 보고 골키퍼를 향해서 돌진하겠지. 이렇게 다른 선수와의 차이를 만들어냈어」
여기서 약간은 전문적이 되어버리겠지만 포메이션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펩이 뛰었던 4-3-3을 독일에서는 4-1-4-1로 표현한다. 언뜻 보기에는 크게 차이나는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똑같다. 4명의 수비수에 1명의 메디오센트로, 2명의 인테리올과 2명의 윙, 그리고 1명의 공격수. 국가에 따라 그 표현이 다를 뿐. 이 포메이션이라는 것을 펩은 중요시하지 않는다.「단순한 전화번호」라고 말한다. 펩의 스승 중 한명인 후안마 리요는「첫 킥오프 때도 그런 배치가 아니다」라며 잘라 말했다. 하지만 쉽게 이해하도록 이 포메이션을 사용한 표현을 이용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펩의 바이에른은 4-3-3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펩은 선수로 데뷔를 원 피보테로 했다. 그 탓인지 도브레 피보테를 계속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도브레 피보테는 자신의 공간이 줄어들어버리고 팀을 조율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묘한 신체의 움직임을 사용한 페인트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구선수로서 그의 원칙인 ‘패스를 받기 전에 다음 패스를 생각하는’것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선수시절 답답하고 상실감으로 가득한 것으로 느꼈던 도브레 피보테를 감독으로서도 피하는 것이다.
호이베르그는 좋은 플레이를 했다. 펩은 이 젊은 덴마크인에게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패스를 받을 때의 움직임, 한쪽 측면에 패스를 줄 것처럼 하다가 반대 측면으로 패스하는 페인트를 거는 방법. 즉, 패스를 사용해서 상대의 라인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17세라 성숙이 필요하다고는 하더라도 바이에른의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펩은 직감했다. 오늘 경기에서 유일하게 90분 풀타임을 뛴 선수는 호이베르그뿐이었다. 바이에른과의 3년 계약 안에 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해야만 한다.
이 경기에서 프랑크 리베리의 첫 포지션은 펩이 사랑하는 펄스 나인(펄스 누에베/가짜 9번)이었다. 레오 메시의 능력발휘에 사용되었고 그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준 포지션이다. 펄스 나인은 펩의 발명은 아니다. 옛 기억에서 끄집어낸 것이며 아르헨티나의 아돌포 페데르네라 시절부터 존재했다. 그는 리베르 플라테의 라 마키나(기계)라고 불렸던 팀의 리더였다(1936~1945). 그리고 처음으로 이 방식을 도입해서 세계로 확산시킨 것이 50년대에 크게 활약했던 매직 마자르(헝가리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히데쿠티 난도르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미카엘 라우드럽, 프란체스코 토티와 같은 선수들도 위대한 펄스 나인이다. 하지만 펩이 옛 기억에서 부활시켜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은 2009년 5월 2일까지는 근대 축구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리그 우승 경쟁이 한창일 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레알 마드리드전. 펩은 훗날 리그 3연패의 첫걸음이 되었던 이 중요한 경기에 ‘폭탄’을 투입한 것이다. 킥오프 10분의 시점에서 득점은 0-0. 에투와 메시의 포지션을 바꾸는 지시가 내려졌다.중앙공격수 에투가 오른쪽 측면으로, 메시는 오른쪽 윙에서 피치 중앙으로 이동. 하지만 원톱이라기보다 좀 더 뒤에 처진,마치 미드필더 같은 포지션이었다. 마드리드의 중앙 수비수 크리스토프 메첼더와 파비오 칸나바로는 그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2013년 11월, 뒤셀도르프에서 메첼더와 식사를 했을 때 당시의 놀라움을 이렇게 말했다.
「펩이 고찰했던 펄스 나인 같은 포지션에 대한 대응은 그 경기(레알 대 바르샤)가 처음이었다고 생각해. 에투를 오른쪽에 놓고 메시가 중앙. 파비오와 나는 이렇게 외쳤지. ‘어쩌지? 어쩌지?’. 메시를 미드필더까지 따라가는 쪽이 좋을지,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서 남을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어. 메시를 쫓아가는 일 같은 건 도저히 어쩔 수가 없더라고」
펩 바르샤는 그 경기를 6-2로 승리, 최종적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특필해야하는 점은 타이틀과 영광과 명성을 독점한 바르셀로나의 시대가 거기서 시작되었다는 점. 그것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풍요로운 축구로. 펄스 나인은 펩의 평범하지 않은 전략가로서의 능력, 메시와 같은 예외적인 축구선수를 통해 재정의 되었다. 결코 펩의 발명은 아니었다.
그러면 어떤 경위로 축구의 기억에서 펄스 나인을 부활시킨 것일까? 그것은 경기 전날인 2009년 5월 1일. 과르디올라는 평소처럼 상대 선수의 연구를 위해 바르셀로나의 연습장에 남았다. 감독으로 취임한 뒤부터 항상 있는 일이고 바이에른에서도 계속하고 있다. 상대 팀의 장점과 약점을 찾아내서 이틀에 걸쳐 상대를 분석한다. 직전 라운드, 전전 라운드를 모두 재검토하고 바이에른에서 함께하고 있는 도메넥과 카를레스 플란차르트 등 코치들이 선택한 장면을 체크한다. 경기 하루 전이 되면 집무실의 문을 잠근 뒤 음악을 틀고(대부분 차분한 음악), 경기의 해결책을 찾는다. 상대는 어디서 공격할까? 우리는 어디서 우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추구에 대해 묘안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2011년 9월, 카탈루냐 의회의 표창을 받았을 때 펩의 말을 인용해보자.
「경기 전이 되면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상대의 영상을 2, 3번 보면서 메모를 해. 그건 내 일의 중요성에 겁먹는 시간이기도 하면서 내가 그 중요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는 때이기도 하지. 그리고 이기기위한 해결책이 순간 떠올랐을 때, 1분에서 1분 20초 정도이긴 해도 그 찰나의 시간만이 내 직업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해」
거의 기적 같은 순간을 대중 앞에서 말했을 때 아마 5월 1일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때까지 17경기 무패였던 마드리드를 격파한 전대미문의 해결책을 찾아낸, 그 밤의 일을……. 그 날 과거 마드리드와의 경기를 몇 번이나 재검토했다. 그러자 미드필더 구티, 가고, 드렌테는 사비와 야야 투레에게 강한 압박을 걸지만 중앙 수비수인 칸나바로와 메첼더는 골키퍼 카시야스의 근처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미드필더와의 사이에 큰 공간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터무니없이 넓게. 게다가 2명의 중앙수비수 사이에도 큰 공간이 있었다.
이 때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 펩은 혼자였고 코치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방의 의자에 앉은 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메시를 상상했다. 메시의 움직임에 당황할 것이고, 에어리어 안에서 동작을 취하지 못한 메첼더와 칸나바로도 상상 속에 있었다.
그리고 깨닫자마자 수화기를 손에 쥐고 분석담당자와 팀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사비가 아닌 메시 본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레오, 나야. 펩이야.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지금 즉시 와줘」라고 전했다.
밤 10시 반, 레오 메시가 조용히 펩의 방문을 두드렸다. 펩은 영상을 메시에게 보여주면서「이 공간은 내일 경기에서 네 거야」라고 보여줬다. 그렇다, 펄스 나인의 공간. 그리고 결전전야의 지시를 내렸다.
「레오, 내일 마드리드전에서는 평소처럼 측면에서 시작해. 하지만 신호를 보내면 상대 미드필더의 배후에 있는, 방금 가르쳐준 공간에서 움직여. 레오, 알겠어? 사비와 안드레스가 미드필더를 넘나들면서 패스를 너에게 보낼 거야. 그러면 곧장 카시야스쪽으로 가라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2사람만의 비밀이었다. 경기 당일에도 티토를 제외한 아무도 몰랐다. 단지 경기 몇 분 전 사비와 이니에스타를 불러 한마디 지령을 내렸을 뿐이었다.「레오가 상대 미드필더와 수비 사이에 있는걸 보면 주저하지 말고 볼을 건네」라고.
2009년 5월 2일, 바르셀로나는 레알을 6-2로 압도했다. 메시가 펄스 나인이 되었고, 펩은 만족한 듯한 미소를 뗬다.
그 이후 펩은 이 형태를 신뢰했다. 오늘 바이덴에서 바이에른의 펄스 나인으로 프랑크 리베르가 데뷔했다. 훈련 첫날 이미 리베리에게는 말을 했지만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길거리축구로 자유분방하게 자란 리베리는 측면에서 볼을 갖고 상대 수비수 쪽으로 드리블해서 동료에게 어시스트를 하는 특징이 익숙하다. 반대 측면만 생각하면 되는 포지션에서 벗어나 양쪽 모두를 생각하는 중앙에서 뛰는 질적인 비약을 이래하기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간 처진 중앙에 있으면 상대 미드필더 배후에서 볼을 받아 그대로 골까지 향할 수 있는데…….
어쨌든 이 첫 경기에서 프랑스인을 시험해봤다.
중앙에서 뛴 리베리와 크로스 및 주변 선수들과의 호흡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즉시 왼쪽측면의 아슬아슬함을 쾌적하게 느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익숙한 특징은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적절한 순간을 추구하고 기회를 기다릴 뿐이다.
바이덴 바이에른은 1-15라는 큰 차이로 바이에른에게 패했다. 하지만 유럽챔피언들에게 감사한다. 펩 과르디올라를 통해 한층 더 강해져서 트레블을 노릴만한 스타선수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광적인 서포터가 아이돌들을 즐기고 있는 한편 새로운 감독은 생각하면서 피치에서 돌아왔다. 호이베르그와 원 피보테, 크로스와 팀의 리듬, 리베리와 펄스 나인…….
7. 람과 타르트의 산 2013년 6월 30일 레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프리시즌 두 번째 경기가 되는 친선경기가 레겐에서 열렸을 때의 일이다.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라커룸 테이블 위에 빵과 타르트, 탄산음료가 산처럼 놓여있었다. 몇몇 선수들은 곧바로 그 속에서 초콜릿타르트를 고른다. TSV레겐과의 경기까지 1시간 15분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다. 테이블 위의 과자산은 경기 당일을 포함해 2일에 걸쳐 보는 광경이었다. 펩은 깜짝 놀라서 팀 매니저인 캐슬린 크루거에게 물어봤다.
「바이덴에서도 그랬지만 왜 지방 클럽에서는 바이에른에게 탄산음료와 과자를 가져다주는 거야?」
그러자「바이에른의 관습에 따른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로부터 4시간 뒤 경기를 마치고 뮌헨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펩은 잠머에게 제안했다.「영양사가 필요해」
체코 국경에 가까운 도시 레겐은 뮌헨에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TSV는 1888년에 창설되었고 현재는 독일 7부 리그에 소속되어 있다. 이 경기는 125주년 기념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레겐의 경기장 관중석은 7천명의 팬들로 가득 찼고,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펩은 이 날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으로 보냈던 마지막 시즌에 사용한 포메이션을 꺼내들었다. 엠레 잔, 보아텡, 디에고 콘텐토3명으로 구성된 수비. 3-4-3이다. 카탈루냐 지방의 지역신문 아라지에서는「펩은 크루이프니즘의 상징인 3-4-3을 독일챔피언에게 적용시켰다」라는 헤드라인을 기사에 붙였다.
크루이프의 3-4-3을 펩은 선수로 경험했다. 바르셀로나 감독시절에는 막 복귀한 세스크를 11명의 가운데에 넣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꺼내들었다. 3명의 수비수는 매우 위험하게 보이지만 엄밀한 전술을 구사해서 멋지게 결과를 얻었다. 가장 눈에 띄는 예가 카림 벤제마가 킥오프 27초 만에 골을 넣었던 무리뉴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였다. 펩은 4-3-3으로 시작했지만 실점 이후 10분 뒤에 3-4-3으로 변경했고 결국 3-1로 역전승을 장식했다.
레겐에서는 첫 45분 동안 3-4-3을 시험하기로 결정했다. 프리시즌의 목적은 모든 것을 시도해보고 선수들을 아는 것이다.펩이 바이에른의 선수를 모른다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름과 얼굴은 일치한다. 선수 각자의 경력, 장점, 단점도 알고 있다. 하지만 리베리와 노이어의 특징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표면적인 스카우팅이 아닌 선수 각자가 팀에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인식한 뒤에 선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감독시절, 펩은 팀의 모든 포지션을 2인 체제로 만들고자했다. 2명의 오른쪽 측면수비수, 2명의 왼쪽 측면수비수, 2명의 중앙공격수…….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펩이 원했던 것은 포지션의 중복이었다. 2개의 포지션에서 뛸 수 있는 선수를 요구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3개의 포지션을. 부스케츠처럼 메디오센트로와 중앙수비수와 인테리올.혹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처럼 중앙수비수, 측면수비수, 메디오센트로를 소화할 수 있는 선수.
가능한 적은 인원의 팀으로 만들고 싶다는 구상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해낸 안이었다. 필드플레이어의 이상은 20명. 특수한 포지션인 골키퍼는 제외했지만 모든 선수가 3개의 다른 포지션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바이에른에서는 하비 마르티네스가 빌바오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메디오센트로, 인테리올, 중앙수비수를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것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선수에게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것을 알 기회가 승패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프리시즌이다. 이 안건을 모색하기 위해 도르트문트보다 10일 빨리 훈련을 시작한 것이었다. 펩은 이 복수적인 능력을 갖춘 선수들을 조합시키는 것에 매우 능하다.
바이덴에서는 리베리의 펄스 나인 기용에 힘을 쏟았지만 이번에는 펜딩이 된 람의 기용 방식이다. 카탈루냐인 기자 이삭 루크는 칼럼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바이에른과 독일 대표팀의 영원한 주장인 람은 경기의 흐름을 활성화시키고자 수비로의 트랜지션(이행)을 위한 인테리올 포지션으로 전환하는 것을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6월 30일은 중요한 개혁의 날이 되었다」
이 날 람은 원 피보테 앞의 오른쪽 인테리올로서 기용되었고 마치 원래 미드필더인 것처럼 뛰었다.
2번째 친선경기도 9-1로 낙승. 뮌헨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펩은 잠머와 대화를 나누며 팀을 위해「영양사가 필요해」라고 부탁했다. 더 이상 빵과 탄산음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잠머가 이 부탁을 들어주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다음 주 토리노 합숙부터 영양사 모나 네마가 팀에 합류했고 라커룸에 있던 타르트의 산은 끝났다).
펩은 잠머와의 대화를 마치고 즉시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람에 관해서다. 흥분해서 오늘의 인상을 말하는 펩에게 옆자리의 도메넥도 동의하듯 귀를 기울였다.
「람의 잠재력을 봤어? 패스코스를 간파한 걸 봤어? 돌아서 볼을 지키는 것도 가능해. 람은 측면에서도 중앙에서도 뛸 수 있는 선수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것은 이번 시즌 가장 큰 포지션 전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PEP CONFIDENTIAL
MARTI PERARN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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