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z-magazin.sueddeutsche.de/texte/anzeigen/42336
쥐트도이체 차이퉁 (일명 SZ) 최근호에 람과의 인터뷰가 올라와 있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람의 축구 외적인 측면-가치관,리더십등-을 높게 사는편이라 람이 쓴 칼럼이나 람의 인터뷰등을 꼭 찾아봅니다. 특히 이번 인터뷰는 지금까지의 국대생활이라던가, 주장으로서의 책무등을 대답해주어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분매에서도 읽어볼만한 인터뷰라고 생각해서 연습삼아 번역한걸 들고 와봤어요.
저는 독일어를 전혀 못해서, 보통은 독일어를 구글번역기로 영어로 돌린 뒤 읽지만 이번엔 양덕이 친절히 영어로 번역해 주었더라구요. (http://takethistooseriously.tumblr.com/post/101406939558/those-silly-talks-didnt-bother-me-interview-with) 다만, 썩 중요하지 않은 몇부분은 개인의 사정으로 생략했다고...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깁니다 인터뷰어가 집요하네요.
인터뷰어의 말은 SZ로 표시했습니다. 사실 분매에 글은 처음 써봐요...흐억 떨려 혹시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축구용어 및 기타 오역 지적 환영합니다(입문한지 얼마 안된 축알못입니다..;ㅅ;) 언제든 피드백 해주세요. 약간 애매한 부분은 (?)표시 해뒀습니다.
제 동료들이 요즘 경기에서 썩 만족스럽지 않아서 별로 기쁘지 않아요, 당신이 물어본 게 그런 의미라면요.
첫 게임은 아내와 함께 시내에 나가느라 보지 못했지만 폴란드에게 진 경기와 아일랜드와 비긴 경기는 봤어요. 저는 '우리'가 안정적으로 예선을 통과할거라고 생각해요.
SZ: 아직도 '우리'인가요?
오, 우리가 육상 경기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언제나 '우리'일거에요. 모두들 1974년의 국대에 대해 얘기할 때도 '우리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지'라고 하죠. 저는 제 친구들과 바비큐를 먹으며 유로를 볼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국대 경기를 TV로 본 건 2002년이 마지막이었죠.
SZ: (예선 동안의)여행은 그립지 않나요?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물론 외국이 궁금하긴 했지만 일 적으로 온 여행이었고, 축구에 집중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케이프타운에서 한 시간 반 쯤 도시 투어를 했어요. 그리고 브라질에서는 많은 도시들에서 경기가 있었고, 어떤 도시는 공항에서 호텔로 향하는 버스가 마치 버스 여행 같았죠.
독서를 했어요. 저는 최근에 해리카머러의 뮌헨을 배경으로 한 두 소설을 읽었어요. 그중 하나는 축구에 대한 소설이었죠. 저는 그의 소설을 3개 더 갖고 있어요. 저녁엔 가끔 포커나 샤프스코프(32장의 카드를 갖고 4명이서 하는 독일 전통 게임)를 했죠.
많이는 아니에요. 브라질에선 뮐러, 노이어, 훔멜스와 함께 했죠.
경이적이죠. (Phenomenal.)
아마도요. 근데 걔도 잘하는 편이에요.
네. 하지만 제가 항상 동료들의 문제에 잘 대처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전 노력했어요.
글쎄요, 모두들 나름의 방식으로 섬세할 수 있죠.
당연하죠, 저는 그의 은퇴경기에도 참가했다구요.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저희는 친분이 있어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런 공격이 있을 때 대응해야 할 사람은 주장이 아니라 협회의 회장, 팀 매니저, 감독이에요. 그 후 선수들이 말을 해야죠.
그가 월드컵 전에 부상 당한 건 저 때문이 아니에요. 선수가 선발되는 걸 정하는 것 도 제가 아니죠. 저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어요. 저는 그걸 알고, 이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아는 모든 사람들도 알죠.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모든 문제를 표현하거나 고심하지 않지만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무엇이든 얻어지죠. 2008년에는 조별 예선 이후에 많은 문제들을 상의했고, 변화했어요. 2012년에도 그랬죠. 솔직히 말해서 모든 매듭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저는 이미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건 10년전-꽤 오래전이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500경기는 치룬 듯한 기분이에요. 상대 선수의 이름은 다리오 크란카였던거 같아요. 그 후 그와 몇번 맞부딪히기도 했죠. final third(축구장을 3등분 했을 때, 팀의 공격 진영)지역의 패스에서 이어진 카스텐 라멜로의 두번째 골은 아직 기억나요.
SZ: 국제경기에서의 첫번째 골은 기억하나요?
저는 5골(루마니아, 코스타리카, 터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스전)만 넣었으니, 당연히 기억하죠. 그래서 저는 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좀 더 기억할만한 일들이 있죠.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스태프들과 포옹한 거라던가, 2004 유로 예선에 떨어진 후 올리버칸이 '꼬맹이들아, 너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한 거 같은 거요. 저는 그때 20살이었죠.
다양한 가능성이 있으니, 축구에 완벽이란 없죠. 113개의 국제 경기엔 좋은 순간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저는 경기 전에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경기에서 공격적이 되기 위해 준비하죠.
아뇨. 그런일은 없어요. 우린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닫죠.
국대에 설명이 필요한 우스꽝스러운 규칙은 없어요. 9시에 아침이 준비되면, 식사를 하죠. 주방이 7시에 열린다고 해서 정확히 7시에 밥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제 아내가 휴가 때 일깨워주었죠.
학교에서 이미 가슴으로 배웠죠. 어릴 때 할아버지네 집에서 국대 경기를 볼 때 국가를 따라부르곤 했어요.
우리는 성격이 확실이 달랐죠. 저는 제 후임인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좀더 비슷해요. 하지만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하죠. 그런 자리에 앉게 되면,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내게 돼요.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26살때보다는 30살때 다른 성격들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좀더 있었죠. 저는 이번 월드컵이 제 마지막 국대생활임을 알았기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어요. 저는 4년전에 비해 결단력이 있었고, 코치들과 팀 또한 그랬죠.
소통문제 같은 게 있죠.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모두 해결 가능하지만요. 특히 2010년에는 모든 선수들이 엄청난 팀정신을 갖고 있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거죠. 하지만 안 좋은 패스 이후에 있는 다툼들은 주장이 모두 다룰 필요는 없어요.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모든 고문이 모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해요. 적절한 이야기를 나눠야할까요, 그들을 훈련 중에 고양시켜야 할까요? 우리는 5명의 숙련된 선수들이 고문으로 있었죠. 그중 3명이 누군가에게 다가가면, 눈에 띄어요. 그러나 만약 고문들이 그 선수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그는 그의 일을 책임지죠. (?) 제게 뛰어난 고문들과 모든걸 공유할 수 있는 선수, 바스티가 있던 건 행운이었죠.
그건 선수들 개개인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어요. 아무도 절 도와줄 수 없는 일들이 있죠. 코치들, 대통령, 대표단(?)과 이야기 하는 거 같은 거요. 2004년에 비해 스태프들은 늘어났고, 브라질에는 장비 매니저부터 심리상담가까지 총 40명의 스태프가 있었죠. 그들은 모두 중요하고, 문제가 있다면 제게 얘기할 수 있다고 알려줘야 했어요.
모든 거요. 볼프강 니에르바흐 또한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해요. 그리고 보너스에 대해서도 협상하죠.
제가 얼마나 협상을 잘하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최근 들어 많은 돈이 선수들에게 간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썩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보너스만 있는게 아니고, 이탈리아같은 경우 스폰서나 예선결과에 따른 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족한게 없었어요.
가끔 그러지만 많은 선수들은 감독에게 솔직히 얘기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요. 어린 선수들은 그렇게 소심하지 않더군요. 그들은 명확한 설명을 원하죠. 제 다음 세대는 융통성이 있어요.
저는 한번도 반장을 해본적이 없어요. 그리고 국대에서 해야할 일들이 학교에서 보다 훨씬 많죠. 그래도, 그 비교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상한 추측이네요. 함께 있는 방을 첫번째로 나가는건 특혜가 아니에요. 그러면 뭐가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네. 저는 제 의견을 공유하고 싶어했어요. 그치만 라인업을 결정하는 건 감독이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감독이죠.
아뇨. 보통 감독이 일대일로 대화했어요.
아닐거에요. 모두가 경기할수는 없고, 팀에는 확실한 체계가 존재하죠. 우리는 누가 경기에서 뛸지 대충은 알고 있었죠. 그걸 선수들에게 설명하는건 제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는 선수들에게 너희들도 팀의 일부라고 말해야 했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보여줬죠. 그들에게 주전은 정해진 게 아니라고 보여주어야 했어요. 만약 훈련 때 "좋은 패스였어"라고 말해준다면 8:8 훈련 때 모두들 기를 쓰고 칭찬을 위해 노력하겠죠. 누군가 에게 직접"좋았어, 너는 우리팀의 일부야. "라고 말하는 건 피해야 해요.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작은 제스처들로 보여줘야 하죠.
선수가 원한다면 그래도 되지만 아무도 제게 상담하러 오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이런 시절은 지나갈꺼야"라고 말하진 않았을 거에요. 동기부여를 했겠죠. 선수들이 선발되지 못하고 실망하는건 나쁜게 아니에요. 그런거에 목을 맨다면 문제가 되겠죠. 메르테사커를 보세요. 그는 월드컵에서 4경기를 뛰고 그 후엔 선발출전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기분나빠하지 않고 다른 선수들을 도왔죠. 그는 좋은 예에요. 또, 마츠가 골을 넣은 뒤 벤치로 달려간 걸 보세요. 후보 선수들은 아주 중요하다는 뜻이죠.
주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페어는 단지 기자의 질문과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거니까, 괜찮죠.
당연하죠. 아무얘기도 안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긴 싫었어요. 월드컵은 진빠지는 일이었어요. 저는 이게 제 마지막 월드컵임을 알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죠. 그 예로 전 저희경기를 모두 다시 봤어요. 저희에겐 경기 상황을 여러 개로 볼 수 있는 기능처럼 다양한 기능이 있는, 환상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었고 모든 경기를 상세히 분석했어요. 저와 뢰브 감독은 환상적이었고, 그와 얘기하는건 어려움이 없었죠. 결정은 항상 그의 몫이구요.
제가 감독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말하지 않을 거에요. 그냥 전술적인 얘기만 했어요.
저는 감독에게 "@@를 빼고 **를 넣어야해"라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지난 8년간 그런 적은 한두번뿐이에요.
네, 우리는 브라질에서도 각자의 생각에 대해 얘기를 나눴어요.
그럴 수 있어요. 오른쪽 풀백인 제가 더 필요하다는 얘기는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한번도 감독이나 선수들에게 "나 오른쪽 풀백으로 돌아가면 안돼?"라고 말한적은 없어요. 저를 빼놓고 포지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감독이 저랑만 얘기하는게 아니란걸 알아요.
원래부터 냉정했던 거 같아요. 저는 제 감정을 안으로 집어넣는 타입이죠.
뭘 말해야할지, 하지 말아야할지는 저절로 익히게 돼요. 2010년, 경험많은 선수들이 없는 상황을 견뎌내야 했을 때 저는 우리 팀이 제가 뛰었던 모든 팀중에 최고라고 말했죠. 저는 사기를 북돋기 위해 말한건데, 다들 웃더군요. 월드컵 후에는 모두들 훌륭한 대회였다고 말했어요.
저는 나무, 달, 해를 완벽히 연기했죠.
제가 뭘 잘하는지 알았을 때요. 저는 항상 가장 작고 마른 아이였죠. 학교에서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고, 숨죽인듯이 지냈어요. 조용한 아이였죠. 사춘기도 늦게 왔어요. 사춘기 때도 수줍은게 다였죠. 16,17살쯤에는 서서히 수줍음이 사라졌고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어요.
뭐라고 떠드는 애들은 있었지만 저는 신경쓰지 않았어요.
요즘 공격적인 선수들은 흔하지 않죠. 모든것이 바뀌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제가 모든 훈련마다 힘을 쏟아붓던 이전 세대를 겪었다는 게 기뻐요. 독일 클럽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죠. 이젠 그 마지막 한방을 그리워하는 훌륭한 어린 선수들이 있어요.(?)
그것 또한 그렇죠. 과거에는 좀 더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 두가지를 적절히 혼용하는건 어렵죠. 우리는 월드컵에서 우승했고, 아마 맞는 방법일거에요. 그렇지만 전 재능있는 아이들이 한번씩은 골을 먹히거나 지게 하는게 좋다고 가끔 생각해요. 저는 챔피언스리그 결승, 유로 결승에서 졌었죠. 한번의 패배 후 이기는건 아주 멋진 일이에요. 저는 그 패배들을 없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월드컵 우승을 좀 더 일찍했다면 좋았겠죠.
저는 떠나기 적절한 시기를 놓치기 싫었고, 제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어요. 주장은 모든 선수들을 통솔해야하고 나이는 중요한 부분이죠. 5년은 축구계에서 긴 시간이에요. 모든 선수들은 저보다 4,5살 또는 9살 어렸어요. 그래서 저는 후배들에게 팀을 넘겼죠.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그래요. 더욱이, 저는 강요하는 타입이 아닌데다가 안될것 같은 일에는 일찍 손을 놓는 편이라서요.
제 아내, 가족, 친구들, 에이전트와 얘기했어요. 그들은 놀라지 않더군요. 모두들 제가 아들과 떨어져 있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어요. 감독도 아마 제 우선순위를 알았을거에요. 제가 은퇴하길 바라진 않았지만 나중엔 사정을 다 알게 되었죠.
솔직히,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껴졌거든요. 대회 중에도 문제가 있었죠.
그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팀은 이미 남티롤에 원정훈련을 갔을 때 저는 뮐러-볼파르트박사와 함께 있었거든요. 거기엔 검사를 위해 2명의 의사가 더 있었는데 검사를 한 뒤 당황했어요. 저는 검사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말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의사들은 검사결과를 알고싶냐고 물었고, 저는 끔찍하겠지만, 저는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면 바로 알고 싶다고 했어요.
발목이 너무 부어서 뭐라고 말할 순 없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발목이 안 좋은 날들이 있긴 했지만 조금씩 나아졌고, 가까스로 뛸 수 있게 되었어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요. 이미 2번의 브라질 훈련이 진행된 후에도 저는 제가 뛰지 못할까봐 걱정했어요.
아뇨. 요가가 제게 효과가 있어서 오랫동안 해왔지만 별로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전 제가 좋아하는 일들만 최대한 오래하려고 하죠. 이젠 그냥 스트레칭만 해요.
저는 4년후에 제가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 축구와 관련된 일이겠죠. 저는 계속 축구를 사랑할 거에요.
아직 그 유니폼을 갖고 있어요. 아무도 교환을 원하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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