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알론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작년, 알론소를 두고 2 볼란치에 최적화된 선수란 글을 쓴 적 있습니다. 빌드업의 사령관이 될 때 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선수지만 정작 후방 빌드업 리더로선 피를로마냥 찬스메이킹을 기대할 정도가 수준까진 아니며, 수비 국면에선 수비 전술의 축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나, 위에서 말한 극단적인 신체 밸런스 때문에 과거 알베르티니처럼 유사시 아예 에이스 킬러로 기용할만한 선수도 또 아니라고요. 2 볼란치 최적화란 말은 수세시 자신의 커버 부하를 덜어줄 파트너 하나를 옆에 두고, 공세시 우군의 공격 역량을 집약해줄 2선 자원들이 있는 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다 끄집어내며 활약할 수 있단 소리고, 이러한 알론소의 활약이 팀의 안정적인 경기력에 정합적으로 맞물린단 이야기죠. 이 조건 중 일부가 갖춰지지 않으면? 수비용 파트너가 없으면 과부하로 경기별 기복이 상당하고(10-12 레알 마드리드), 유능한 2선이 없으면 자기 할 빌드업은 잘해도 팀 공격이 심란해졌습니다(05-07 리버풀).
마냥 알론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알론소 자체가 그런 선수인걸요. 그래서 리스크를 감수할 생각이 없거나, 알론소가 아닌 다른 재원을 중심으로 둬도 될만치 복받은 미들 자원을 지닌 팀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죠. 팀내 비중을 확 줄이는 겁니다. 철저히 영향력을 하프라인 이하에 한정하며, 간혹 참여하더라도 제한적으로 허용하거나요. 이러한 팀에서 알론소는 우군의 공세 국면에서 후방 빌드업을 전담/혹은 분담하며, 수세시엔 커버 요원 1 수준의 영향력을 지닐 뿐입니다. 알론소일 이유가 없죠. 그럼에도 많은 팀들에서 주전 자릴 지켰던 건, 어쨌든 제한된 롤에서나마 그만한 수준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가 팀내에 몇 명씩이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나마 워낙 다양한 롤에서 활약할 수 있는 장점들을 지닌 알론소니까요. 압박에 처절히 털릴 게 두려웠던 무리뉴 레알이 10-11시즌 후반기부터 바르샤를 만날 때 이러했고, 샤비/부스케츠/알론소라는 세 미드필더의 교통정리가 미진했던 남아공에서 스페인이 이러했고, 모드리치가 영입된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가 그러했습니다.
알론소가 애매했다는 시기가 뭐 이리 많냐구요? 언급한 조건들이 상당히 갖추기 까다로웠으니까요. 제대로 갖춰졌던 팀? 08-09 리버풀과, 유로 2012 스페인 정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 빌드업 리더로서 자질을 지녔어도 이를 팀내에서 역량껏 발휘할 수 있는 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정이 나은 피를로만해도 그렇죠. 찬스메이커로서 피를로가 메인 공격 루트로 활약했던 팀은 2006 월드컵과 유로 2012의 아주리, 그리고 선수 말년 유벤투스 정도입니다. 전성기를 비롯해 선수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밀란에선 결코 팀의 공격 과정을 주도했다고 말할 정돈 아니었죠. 그렇다고 성공적이었다는 08-09 시즌이나 유로 12 때 알론소의 그것보다 못했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 이야길 하는 게 아니죠. 앞서 말한대로 빌드업 리더로서 피를로의 역량은 찬스메이킹까지 포괄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밀란 시절 피를로는 카카까지 가지 않더라도 파트너였던 셰도르프보다 높다고 말하기 어려울테니까요. 어쩌면 알론소보다 더 충족시키기 어려운 게 피를로의 조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리와 유벤투스가 기꺼이 이를 감수한 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테죠. 피를로는 결과로 증명하구요. 특정 선수가 과연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보여줄 수 있느냐가 여기서 드러나죠. 모든 미드필더가 피를로가 되어야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구요. 허나 알론소가 미들로서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빌드업 리딩이고, 이건 팀이 어느 정도 조건을 맞춰줘야만 제 활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정작 이 조건을 마냥 만족시키기엔 피를로처럼 팀의 공격 국면에 깊숙이 관여하기 어렵습니다. 아예 그럴 거면 킨이나 레돈도, 아니, 이들까지 댈 거 없이, 당대 캄비아소처럼 팀 입장에서 굉장히 자유로운 조건인 편이 나았겠죠. 보다 많은 기간 일신의 역량을 온전히 펼쳐낼 수 있었을테니까요.
어이없는 이야기죠. 이랬으면 낫고 말고가 어딨겠습니까. 아마 십 년 가까이 팬이었던 선수에 대한 아쉬움일 겁니다. 2013년 한창 이적설 돌던 알론소를 보면서 이제 알론소도 슬슬 탑레벨 선수로서 정점에서 다투던 곳에서 내려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2미들 최적화 알론소 운운했단 글은 이런 생각에서 섰지요. 알론소를 팬으로 지켜본 기억에 대한 일종의 기념비랄까요. 아쉬움이 남았기에 정작 비문은 푸념조가 되었지마는요. 해서 안첼로티 부임하고 알론소가 잘하는 걸 보는 중에도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별 놀라움은 없었다는 말이죠. 특별히 새로운 건 없었으니까요(정말 놀라웠던 건 디마리아죠.). 기실 서른 셋 먹은 선수에게 지금까지완 다른 모습을 기대한다는 거 자체가 어이없는 짓일 수도 있구요. 우리가 독일 월드컵 이후 스콜스를 보며 놀란 게 그런 이유 아니겠습니까.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부분적으로 보여왔던 모습인데도요.
그리고 지금 전 그때만큼 놀라고 있네요.
펩은 알론소로 하여금 최대한 라인 단위 압박에 노출될 일이 적게 써먹고 있지요. 펩 바르샤와 펩 뮌헨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바르샤도 타팀에 비하면 많은 편이긴 했지만 뮌헨의 경우 그런 바르샤와도 격을 달리할 정도로, 아니, 아예 같은 궤에서 논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싶을 정도로 하프라인 이하의 스위칭이 빈번하단 겁니다. 베르낫-알라바-보아텡-알론소-베나티아-람 사이의 포지션 체인지가 굉장히 광범위하게 일어나죠. 이 와중에 알론소나 알라바, 람은 수시로 3백 중 한자리를 커버하구요. 상대의 라인 단위 압박에 선수 개인이 고전할만한 양상에선 람과 알라바가 출동하며 알론소는 저 아래 센터백 라인에 가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가 라인을 내리며 우군의 가패 국면이 시작되면 알론소가 자연스레 올라와 후방에서 팀 빌드업의 키를 쥐지요. 꼭 과거의 리베로가 그러했듯 말입니다. 아니... 걍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리베로 같아요. 한 20년 전, 90년대 초에 축구보던 팬에게 지금 뮌헨 경기 보여주며 알론소에 대해 물으면, 살짝 고민이야하겠지만, "리베로잖아"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문득 선수로서 알론소가 가진 특성들이 리베로로서 큰 이물감 없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사실 리베로는, 상대의 압박이며 시시각각 코 앞에서 변하는 전장의 국면이며 등등의 어려움을 무마할 수 있다면 굳이 필요한 보직이 아닙니다. 최후방은 필드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너무 외진 곳에 있죠. 그리고 골대는 정반대편에 있고,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거든요. 다만 저 등등의 어려움을 무마하기가 당시로선 지난했고 후방에서 볼을 수급하기 용이했기에 90년대 초반까지 리베로는, 필수는 아니지만 특수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수비형 미드필더처럼요. 그러나 사키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의 라인 단위 압박을 전개하고, 이와 맞물려 백패스 금지규정이 등장하자, 이전과 달리 수비 라인에서 볼 돌리는 건 언제 위기를 초래할지 모를 불안한 일이 됩니다. 자연히 수비 라인에서 처리하기 마땅찮은 볼을 미들까지 안전하게 올려줄 수 있는 자원이 요구되었고, 이제 필수가 아니던 수비형 미들이 필수가 되기 시작하죠.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됩니다. 해당 시기 둥가, 펩, 레돈도, 킨, 에펜베르크, 데샹 등이 각광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죠. 서로 차이가 확연한 선수들입니다만, 한가지 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3선 미드필더들이란 겁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시대가 이들에게 볼을 쥐어준 거죠. 이전까지 리베로가 맡았던 역할은 자연스레 수비와 미들 라인이 찢어가구요.
그래서 다들 리베로를 쓰지 않았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근데 사실... 반드시 필요해야만 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더라구요.
다니엘 알베스를 봅시다. 소위 말하는 플메형 사이드백이죠. 근데 플메질을 굳이 사이드백에서 해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딱히 그런 거 같진 않습니다. 위에서 말한 리베로 이상으로 플메형 사이드백은 애매합니다. 그리고 알베스도 세비야 이후론 딱히 팀내 빌드업 리딩을 떠맡고 이런 적은 없구요. 바르샤 역시 알베스 대신 마이콘을 영입했다고 해도 잘 했겠고 팀은 여전히 쎘겠죠. 하지만 알베스가 있었을 때만치 강했을까하면 고개가 아무래도 갸웃합니다. 알베스가 있었을 때보다 강했을까란 의문은 더더욱 의문 부호가 들죠. 풀백으로서 활약 외에, 마이콘이 추가됨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플러스 알파도 있긴 하겠지만 알베스가 있음으로서만 가능한 플러스 알파가 얼마나 무지막지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요. 바르샤에서 알베스가 플메로서 자신의 역량을 모두 털어내는 경기는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특정 장면에서 플메질이 가능한 선수기에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경기는 무수히 많죠. 그리고 이 각각의 장면들이 바르샤란 팀의 역량에 얼마나 큰 이바지를 했는진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겁니다.
이같은 알베스의 활용은 바르샤가 채택했던 비대칭적 전술 운용 덕입니다. 중앙 따위 집어치우고 축구장을 크게 좌우로 가르면, 팀 역량의 대부분을 라이트 사이드로 몰빵했지요. 부스케츠, 샤비, 알베스, 페드로, 메시 모두 라이트를 오가며 지지고 볶고 했죠. 팀의 빌드업이 주로 라이트를 축으로 전개되니 볼은 주로 라이트로 돌기 마련이고, 커버 부하도 당연 라이트 사이드에 몰리기 마련이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레프트의 아비달과 인혜 덕분이죠. 소수라고 하나 국면이 좌측으로 전환될 때도 밀리지 않고, 지원 올 때까지 버틸만한 역량이 되는 자원들이었으니까요. 또한 공격시에도 레프트가 호구가 아니기에 상대 입장에선 라이트만 틀어막기 곤란해집니다. 라이트 쪽에 죄다 쏠렸다가 샤비가 레프트로 확 볼을 넘겨주면 얻어맞기 십상이니까요. 실제로 이런 패턴에 당한 팀들이 꽤 되는데, 그 때문에라도 상대는 더더욱 대비할 수밖에 없고, 덕분에 라이트는 더더욱 강력하게 상대를 찌를 수 있게 됩니다.
당시 바르샤의 좌우 비대칭에 대응할만한 뮌헨의 특징적인 전술 운용이 있다면, 앞서 언급했던 하프라인 이하의 무한 스위칭이 있을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르샤의 비대칭적 운용이 메시와 알베스의 극대화를 가능케 했다면, 이에 대응될 뮌헨의 후방 포지션 체인지는 양 사이드백과 리베로를 활용하는데 방점이 가 있다고 보구요. 그 바르샤를 지탱하는 게 인혜와 샤비, 부스케츠 등이었다면, 뮌헨의 전술을 지탱하는 건 알라바와 람이겠죠. 그리고 베르낫과, 부분적으로 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후방에 기반했던 전술은 전방과 단단히 이어지며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국면에서의 미진한 부분을, 알라바는 필드 전역에 편재하며 충족시켜주고요. 그 사이사이에서 알론소는 리베로가 됩니다. 알베스가 바르샤에서 경기 중 때때로 플메로 보인 것처럼요. 알론소에게 부족한 미들로서 역량은 알라바와 람이 때때로 대체하며, 그 경우 이들이 위치할 자리론 반드시 2선과 사이드, 혹은 센터백들이 커버를 들어옵니다. 이때 부족한 부분? 여러 선수들이 처리합니다만, 대표적으로 알라바가 처리합니다. 필드 전역에 편재한다는 건 이러한 뜻이죠. 즉, 알론소가 아예 내려앉아도 수싸움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미들 라인 포함 그 아래로 뮌헨의 모든 보직과, 그 보직에서 거의 대부분의 롤을 상당한 완성도로 소화할 수 있는 람이 뛰고 있으니까요.
2미들 최적화네, 뭐네 주절거린 제가 자연히 무색해지더군요. 다른 시대에 태어난 알베스를 보았다면 저는 또 무어라 했을까요. 이게 바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알량한 안목이야 어떠하든 선수의 오랜 팬으로서 참 기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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