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undesmania.com/xe/index.php?mid=fuss&search_keyword=%EA%B7%B8%EB%A0%88%EA%B3%A0%EB%A6%AC%EC%95%85&search_target=title&document_srl=1261586 - 저번 글
그레고리악이 누구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 간단하게 소개해보면 독일 사는 아저씨로(뮌헨이었던 걸로) 제가 얼마 전 소개했던 Historical-lineups.com의 운영자이고, 빅사커에서는 2002년부터 활동한 유명 회원입니다. 그레고리악은 그 빅사커에서의 아이디고, 분데스리가 파나틱에서는 본명인 볼프 슈타이너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40대라 연륜도 연륜이고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섭렵했는데, 특히 5-60년대 키커 자료까지 갖고 있어서 역대 랑리스테를 정리한 것도 이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영어로 메일을 주고 받았고, 제가 묻고 그레고리악이 답한 형식입니다. 곁가지는 살짝 쳐내면서 핵심만 옮겨적겠습니다. 단 아래의 내용이 절대적으로 옳은 건 아닙니다. 제가 본인의 의견을 물은 것도 있고, 보편적인 독일인의 관점을 물어본 것도 있거든요. 그레고리악 역시 자기 의견(here is my opinion)이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Q. 당신이 올렸던 키커 베스트11과 현재 키커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베스트11의 내용이 꽤 상이하다. 당신의 베스트11은 공식 자료인가?
A. 내가 올린 베스트11은 당시 키커 판본을 보고 옮겨적은 것이다. 나도 키커가 왜 바꾼 건지 잘 모르겠다. (이후 추가 답장) 내가 1979-80시즌(주1)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키커 홈페이지의 베스트11은 꽤 이상하다. 디츠가 라이트백, 칼츠가 센터백으로 되어있는데 디츠는 레프트백이지 라이트백으로 뛴 적이 없다. 칼츠 역시 이때는 스위퍼가 아니라 라이트백으로 뛰었다. 브리겔도 이 시즌에는 레프트백이 아니라 센터백으로 많이 나왔었다. 나도 누가 이런 인공적인 라인업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축구적인 관점에서 이 베스트11은 엉터리다.(주2)
Q. 왜 슈틸리케는 78월드컵에서 제외되었는가? 속설처럼 헬무트 쇤이 내린 해외이적 금지령을 무시한 대가인가?
A.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DFB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마도 해외에서 뛰는 선수는 뽑지 않을 것이며, 헬무트 쇤 감독이 해외의 선수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유였다. DFB가 국가대표 선수들이 해외진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라이너 본호프는 1977년에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월드컵 때문에 1년을 기다렸다.(주3) 그러나 슈틸리케는 개의치 않았고, 월드컵에서 뛰지 못할 수 있음을 알고도 스페인행을 결정했다.
Q. 브라이트너가 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가 복귀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가? 정말 슈스터와 불화가 있었는가?
A. 브라이트너는 축구협회 관계자들과 첨예한(very strenous) 관계였다. 나도 세부적인 관계는 설명할 수 없다. 1975년에 브라이트너는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바뀌기 전까지는 다시는 독일 대표팀을 위해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1981년에 루메니게의 설득으로 복귀를 결심했는데, 루메니게와 브라이트너는 바이언에서 대단한 콤비였고,(주4) 브라이트너는 1982월드컵를 노렸다. 1979-81년 사이 독일은 브라이트너 없이도 제법 잘 굴러갔지만 문디알리토에서의 실패(주5) 때문에 언론과 축구인들로부터 이제는 브라이트너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슈스터, 디츠, 한지 뮐러는 브라이트너를 반기지 않는 입장이었다. 브라이트너는 매우 완고한(headstrong) 사람이었고, 어디를 가든 자기가 보스가 되고 싶어했다. 따라서 非바이언 선수들이 브라이트너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주6)
Q. 젤러 vs 루메니게 누가 독일의 2번째 공격수인가?
A.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봤을 때 순수한 축구적 관점(pure footballing view)로는 루메니게가 No.2지만 분명히(by far) 젤러가 더 위대한 레전드(bigger legend)다.
Q. by far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자세히 설명해달라. 루메니게는 언론들로부터 Top30-50까지도 평가받는데 독일 밖에서 젤러가 과소평가 받거나 루메니게가 과대평가라는 의미인가?
A. 분명(by far) 루메니게가 더 나은 축구선수지만, 젤러는 독일의 가장 위대한 레전드 중 한 명이다. 그는 가장 전설적인 3명의 선수중 하나인 시대 순으로 프리츠 발터, 우베 젤러, 프란츠 베켄바우어다. 젤러는 1960년에 이미 인기있었지만 진정으로 레전드가 된 것은(became true legend) 1961년에 인테르의 제의를 거부하고 함부르크에 잔류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인테르로 갔다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 프로축구가 없었다는 것을 떠올려보라.(주7) 젤러는 축구를 하면서 주중에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이탈리아로 갔다면 하룻밤 만에 백만장자가 되고 더 이상 일을 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는 이 기회를 포기했다. 그의 헌신적인 축구스타일과 포기하지 않는 태도 역시 그를 위대한 레전드로 만든 요소 중 하나다. 따라서 루메니게가 더 나은 축구선수지만, 결코 젤러와 같은 레전드로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Q. 푈러 vs 클린스만은? 내 생각에 클로제는 피셔, K.알로프스, 비어호프보다 나은 거 같은데 과연 푈러-클린시와 비교될 수 있을까?
A. 쉽게 푈러를 고를 수 있다(V?ller was the better footballer easily). 클로제는 확실히 어느 정도 푈러-클린시와 비교될 수 있는 선수다. 알로프스는 창조적인 선수이자 전방에서 물러나 종종 미드필드에서 뛰는 공격수였지, 최전방에서 뛰는 공격수가 아니었다(그는 대개 레프트윙에서 뛰었다). 피셔는 독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골잡이 중 하나였지만 1971년의 승부조작 사건(주8) 때문에 국가대표 커리어가 토막났고, 1978 월드컵에서 실망을 안겨줬다. 흐루베쉬는 어쩌면 가장 재능이 부족한 선수였을지 모르지만 실망시킨 적이 없는 선수였다. 개인적으로 난 클로제를 좋아하진 않지만(not a big fan of Klose), 그가 오랜 기간 독일 대표팀을 위해 피셔/흐루베쉬/비어호프보다 더 낫긴 했다. 하지만 클럽에서는 그처럼 인상적이지 못했고,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피셔를 클로제보다 위로 평가한다.
Q. 역시 easily라는 표현을 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인가? 전성기의 활약? 지속성? 아니면 전반적인 커리어? 내가 봤을 때는 푈러가 4살 연상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비슷한 커리어 같다.
A. 푈러가 클린시보다 축구를 잘했다. 기동력이 좋았고, 측면으로 침투할 수 있었고, 드리블과 페인트로 측면수비수를 괴롭히고, 양발을 써서 정확한 크로스를 날릴 수 있었다.(주9) 뿐만 아니라 후방으로 내려와 빌드업에 관여하기도 했다. 클린스만이 때로 더 헌신적이었을 수는 있지만(perhaps more committed) 축구는 푈러보다 뒤처졌다. 독일 밖에서 클린스만이 더 이름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축구적인 관점에서는 푈러가 더 나은 선수다.(주10)
Q. 독일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백이 브레메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브라이트너가 최고, 그 다음이 슈넬링거, 브레메는 디츠-브리겔과 같은 레벨이라 생각한다.
A. 이것도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브레메를 좋아한다(great fan of Andi Brehme). 그의 크로스는 최고였고 좌우 어디서든 뛸 수 있었다. 브라이트너는 레프트백으로 단 4년만 뛰었지만 그 기간 동안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슈넬링거는 수비적인 면에선 이들 중 최고지만 브레메/브라이트너처럼 전진을 잘 하지는 못했다. 디츠는 가장 과소평가된(most underrated) 레프트백이다. 훌륭한 테크닉에 위협적인 전진능력, 거기에 수비도 뛰어났다. 밸런스로 보면 그가 최고의 레프트백일 수도 있다! 하지만 브레메/브라이트너가 전성기에 보여준 공격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브리겔은 다양한 역할을 잘 소화했기에 레프트백으로만 국한시키고 싶지 않다. 레프트백으로서 전진도 잘하고, 헤딩도 잘하고, 피지컬이 뛰어나고, 공격수들을 잘 제어했다. 그러나 스토퍼로 많이 뛰었고 (브라이트너처럼) 순수한 레프트백은 아니다.(주11)
Q. 한국에서 발락은 독일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나는 발락이 약간 과대평가라고 생각하며 슈바이니가 조금 더 나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독일인들의 시각은 어떠한가?
A. 2002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했으니 한국인들이 발락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인들의 관점에서 02월드컵은 결승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성과로 여겨지지 않는다(not considered a great achievement). 다른 월드컵과 비교했을 때 02월드컵의 준우승은 리스트의 상단에 놓을 일은 아니다. 독일축구의 암흑기로 재능없는 팀에서 돋보이는 선수는 큰 활약으로 인정받지 못한다(It was the "dark age" of German football and being the outstanding player in a not so talented team is not considered a super feat).
Q. 코르도바의 기적(1978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가 독일을 꺾은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이변인가? 페차이가 이 경기로 평가가 높아진 건 알고 있다(주12).
A. 대단한 이변이었다. 1931년 이후 47년간 오스트리아는 독일을 이기지 못했으며(주13), 특히 이 두 팀은 경기를 자주 갖는 편이었다. 페차이, 프로하스카, 크란클 등이 명망있는 선수들이었다.
Q. 1982월드컵은 알제리에게 당한 패배, 오스트리아와의 봐주기 경기, 슈마허의 바티스통 가격 등 독일에게 사고가 많은 대회였다. 이는 독일인에게 수치스러운 대회인가? 아니면 여러 토너먼트 중 하나일 뿐인가?
A. 독일인들에게 수치스러운 대회다. 바티스통의 사고야 슈마허 개인의 잘못이지만 오스트리아전은 팀 전체의 잘못이다. 프랑스와의 혈투에도 불구하고 82월드컵은 독일 축구사 최악의 대회로 여겨진다(1982 is today considered the worst episode in German football history).
Q.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토퍼는 누구인가? 볼프강 베버? 빌리 슐츠? 슈바르첸벡? K.푀르스터? 콜러? 부흐발트? 보아텡이 훗날 이 대열에 낄 수 있을까?
A. 내 생각에는 푀르스터가 최고고 콜러가 그 다음이다. 베버는 훌륭했지만 부상이 너무 많았다. 슐츠는 스위퍼였고 스토퍼로는 가끔씩만 뛰었다. 부흐발트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수미와 스위퍼로 많이 뛰었지만 현대에는 스토퍼로 언급된다. 난 분명히(clearly) 푀르스터와 콜러보다 아래라고 생각한다.(주14) 슈바르첸벡 역시 마찬가지로 푀르스터와 콜러 다음의 클래스2라고 생각한다. 보아텡은 지역방어를 수행하기 때문에 과거의 스토퍼와는 조금 다르다. 현재의 레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은퇴한 뒤에 3인자로 꼽겠다.
주1. 제가 처음 물어볼 때 흐루베쉬가 빠진 게 이상하다고 79-80시즌으로 물어봤고, 저 시즌뿐만 아니라 다 요상하게 바뀌었습니다.
주2. 포지션을 수-미-공으로 나누고 엘프 데스 타게스 순으로 다시 뽑은 걸로 보입니다. 배치는 좌우 안 따진 거 같고요.
주3. 본호프는 1978년에 발렌시아로 이적했습니다.
주4. 브라이트니게(Breitnigge)로 불렸고 키커가 1980년에 브라이트너가 국대에 없는 게 아쉽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주5. 문디알리토(Mundialito)는 1980년 연말부터 1981년 1월까지 우루과이에서 열린 이벤트대회로 '미니 월드컵'으로 불리는 대회 중 하나입니다. 역대 월드컵 우승팀들과 잉글랜드를 대신해 참가한 네덜란드까지 총 6개국이 참가했고, 우루과이의 우승으로 끝났습니다만 우루과이가 월드컵도 못 나가면서 모양새가 빠지게 됐죠. 서독 대표팀은 유프 데어발 부임 이후 첫 패배를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꼴찌에 그쳤고, 루메니게를 포함한 핵심선수들의 숙소 무단 이탈로 그야말로 대망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http://soccernostalgia.blogspot.kr/2015/09/tournamenta-part-2-mundialito-198081.html?m=1 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스압 주의 요망.
주6. 슈스터는 불화로 은퇴했다고 알려져있는데 1984년까지 뛴 것으로 보아 데어발 감독이 보다 문제였던 것 같고, 디츠는 딱 1981년에 은퇴해서 뒷말이 좀 있습니다.
주7. 당시 독일 리그는 세미프로였고,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에도 한동안 급료상한선이 있었습니다.
주8. 클라우스 피셔는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약 1년 정도 출장정지를 당했고, 이로 인해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도 한참동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습니다.
주9. 푈러는 윙포워드로 뛴 적도 있습니다.
주10. 개인적으론 클린시가 발롱도르 2위 + 잉글랜드에서 뛰어본 경험 때문에 유명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주11. 브리겔은 레프트백, 스토퍼, 수미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고 옹즈로부터 '슈퍼맨'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주12. 페차이가 처음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했을 때 월드클래스 센터백이 왔다고 대단한 기대를 모았다고 합니다.
주13. 1938년에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나서 구 오스트리아팀을 불러 경기한 적이 있는데 이건 오스트리아가 이겼습니다. 진델라르가 나치를 물먹인 세리머니를 한 걸로도 유명하죠.
주14. 예전에 분매에 올린 적이 있는데 키커가 '콜러와 부흐발트의 차이'라면서 콜러를 추켜세운 적이 있습니다. 세간의 평도 대개 콜러>부흐발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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