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랙의 어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AS의 엘 크랙이 우리나라에서 의미가 변하여 현재의 쓰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데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크랙은 우리가 축구커뮤니티에서 널리 쓰는, 드리블을 비롯한 일신의 역량으로 상대 수비에 균열을 내고 찬스를 낼 수 있는 선수라고 정의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분매에서 활동한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많은 글을 써왔으니 제 축구관이 어떤지 알고 있는 회원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드리블러 별로 안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드리블에 집착하고, 드리블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볼호그를 싫어합니다. 드리블이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고 돌파하는 걸로 땡이 아니라 드리블을 바탕으로 그 플레이의 연장이 이뤄져야만 뛰어난 플레이라고 본다는 거죠. 누가 저에게 디에고 마라도나가 왜 최고의 선수였냐고 묻는다면 그 드리블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 드리블을 활용한 패스와 플레이메이킹이라고 말하며, 비단 마라도나뿐만 아니라 다른 드리블러를 높게 평가할 때도 그들의 드리블에 찬사를 보내는 게 아니라 드리블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드리블러들의 온더볼에 대한 과대평가와 드리블을 선호하지 않는 선수들의 오프더볼 역량에 대한 과소평가가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간단하게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먼저 1970월드컵 결승전이 있습니다. 4:1이라는 스코어에서 나오는 직관적인 이미지와 이탈리아가 4강에서의 혈투 때문에 무기력했다는 일반적인 서술과는 달리 브라질은 꽤 어렵게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물론 이탈리아가 체력적 한계를 드러냈고 저도 위키에다가 이탈리아가 4강에서 고전했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는 했습니다만 경기 중반만 해도 이탈리아가 브라질에게 리드를 잡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죠. 브라질의 공격이 정말, 정말, 정말 형편 없어서 어설픈 공격을 하다가 차단당하고 이탈리아의 역습에 위태로운 상황을 많이 맞았거든요. 그리고 그 원인이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입니다. 당시 브라질의 진형을 간단하게 보면 4-2-4를 써서 히벨리누-토스탕-펠레-자이르지뉴에 2미들로 지르송-클로도아우두를 세웠고, 지르송이 2선까지 올라와 플레이메이킹을 하고 클로도아우두가 공격진과 수비진의 밸런스를 잡아줍니다. 그런데 전반전만 해도 지르송은 측면으로 공을 몰아줍니다. 보다 중앙에 가깝게 내려온 히벨리누에게 공을 연결해 좌측면을 뚫거나 오른쪽에서 오버래핑하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게 공을 넘겨줘서 자이르지뉴와 함께 우측을 파게 만드는 거죠. 또는 자이르지뉴가 중앙까지 들어와서 돌파를 하기도 했고요. 즉, 테크닉이 최고 수준인 선수들을 여럿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냥 니들 맘대로 뚫어! 라는 식으로 던져준 겁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털립니다.
당시 이탈리아 수비진이 호구였던 것도 아니고 왼쪽에 지아친토 파케티, 오른쪽에 타르치시오 부르그니치가 있었고 중앙에서 뛰던 피에를루이지 세라와 로베르토 로자토, 그리고 마리오 베르티니를 위시한 3명의 미드필더들도 수비력이 뛰어난 선수들이었습니다. 드리블로 1명까지는 어떻게 제치기는 하는데 이어지는 협력수비에 가로막혀서 번번히 공격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루이지 리바와 산드로 마촐라, 로베르토 보닌세냐의 날카로운 역습에 위기를 여러 번 맞습니다. 그러면 이걸 공격루트의 다각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지르송이 무리하게 돌파하는 걸 선택하면서 더 꼬입니다. 그나마 자이르지뉴는 워낙 돌파력이 뛰어나니까 나름 한끗 차이로 아깝다라는 생각이라도 들게 하는데 히벨리누는 그런 것도 없고 턴오버만 남발, 까놓고 히벨리누는 이 경기에서 펠레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거 말고는 기여한 게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그 어시스트는 드리블이 아니라 쇄도에 이은 감각적인 킥으로 만들어낸 거고요.
브라질이 찬스를 만든 게 10번 정도 되는데 거기서 드리블로 공간을 만들어낸 건 잘 쳐줘야 지르송이 중거리슛 날린 2번입니다. 그것도 2번째 골은 지르송이 굉장히 잘 때린 슛이었고, 이후 히벨리누가 패스해준 건 공간이 완전히 열린 게 아니라 딱히 찬스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입니다. 4번째 골에서 클로도아우두의 화려한 탈압박이 유명하긴 합니다만 그건 애초에 아래 있는 지르송 -> 히벨리누로 연결하면 될 장면이었죠. 그럼 나머지는 뭐냐면 다 2대1 패스나 스루패스, 롱패스로 나온 상황들입니다. 첫번째 골과 세번째 골은 롱패스를 펠레가 헤딩을 따내서 만든 것이고, 전반 막판의 골찬스 역시 프리킥을 펠레가 가슴 트래핑을 받아서 만들어낸 거죠(골도 넣었는데 하프타임 됐다고 무효 처리됩니다). 펠레가 머리를 얻어맞고 프리킥 선언된 장면도 2대1패스로 시작된 찬스였고, 후반전 펠레의 1:1 상황 역시 2대1 패스였습니다. 로빙패스를 날리려면 엔드라인까지 윙이 돌파한 다음에 크로스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이 경기에서는 브라질 선수들의 킥이 워낙 좋다보니까 엔드라인까지 잘 가지도 않고 페널티 에어리어 대각쪽에서 그냥 얼리 크로스를 쭉쭉 올립니다.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지르송, 토스탕이 그렇게 헤집고 다니는데 정작 좋은 찬스는 피지컬이 죽어서 걸어다니던 펠레가 만듭니다. 최소 마크맨 1명이 따라붙다가 공을 잡으면 몰려들어서 반칙, 펠레가 그걸 따돌리면 빈 공간으로 패스 or 롱패스 날아올 때 수비 따돌리고 정확한 헤딩 or 2대1패스로 반박자 빠른 침투, 이런 식으로 어지간한 찬스는 다 펠레의 발에서 나옵니다. 즉 최고의 드리블러가 있어봤자 결국 찬스를 만든 건 조직적인 움직임과 패스였다는 거죠. 비단 결승전 뿐만 아니라 펠레는 매 경기 공격포인트를 만들고 팀내 공격을 주도했는데 정작 opta의 집계로 보면 펠레의 드리블은 그냥 평이합니다.
이와 함께 꼽을 수 있는 게 1986년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2014년의 리오넬 메시입니다. 비슷한 거 같은데 완전 다르죠. 이 대회에서 마라도나는 7경기 동안 무려 50회가 넘는 말도 안 되는 드리블 돌파를 기록합니다만 마라도나는 아무 때나 돌파하는 것도 아니라 좋은 위치에 패스를 받을 동료가 없을 때 돌파를 시도하며, 그 끝은 반칙을 당해 넘어지는 게 아니라면 대개 빈 공간으로의 패스 또는 자신의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2014년의 메시는 돌파는 정말 잘 하는데 굳이 돌파할 필요가 없는 장소에서도 돌파를 시도합니다. 50m 돌파하는 거면 몰라도 스위스전처럼 하프라인 근처의 터치라인에서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상대 선수 3, 4명을 돌파하는 건 보기만 화려하지 별 의미도 없고, 그래놓고 전방에 빈 공간에 있는 선수에게 주는 게 아니라 뒤에 있는 선수에게 줘버립니다. 정말 아무 의미 없죠. 말 그대로 드리블을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너무 오래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적절한 공간 동료가 자리를 잘 잡고 있더라도 바로 넘겨주지 못하고, 수비수들에게 에워쌓일 때 주거나 혹은 자신이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왕왕 나오고요.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도 스루패스 찔러줄 타이밍 놓쳐서 3명인가 돌파해놓고 공격권 잃은 적이 있죠. 보고 있으면 정말 잘하는 건 알겠는데 스스로 일을 만드는 느낌이 들고, 찬스 날려먹는다고 까이는 공격수들이 공 받는 장면을 보면 터치하고 슈팅하기에 좋은 자리로 딱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죠. 오히려 그 공 받으려다가 신체동작이 꼬이기까지 합니다. 이게 또 이상한 게 차라리 메시가 패스를 못 하는 거면 이해를 하겠는데 분명히 50m 스루패스 찌르는 장면도 있고, 시야도 넓고 패스도 잘하는데 자꾸 무리를 합니다. 아마 메시가 그 엄청난 파괴력과 패스실력, 그리고 어시스트에도 불구하고 플레이메이킹에서 최고가 아니라는 소리가 나오는 건 이런 이유에서겠죠.
그리고 드리블에 대한 집중이 온더볼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데, 드리블 실력을 곧 온더볼로 치환하고 나아가 공격력을 결정짓는 잣대로 삼는 경향이 보입니다. 10년 전의 데니우손이 그 화려한 드리블에도 불구하고 드리블만 할 줄 아는 바보로 불렸던 건 1:1 외의 역량이 미달이었기 때문인데 요즘에는 그냥 드리블 좋으면 공격력이 좋은 걸로 간주해버립니다. 같은 맥락에서 1998년의 호나우두와 2002년의 호나우두를 비교할 때 98년이 02년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현재 메시 다음으로 드리블을 잘한다고 꼽히는 에당 아자르의 파괴력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건가도 의문이고, 토마스 뮐러가 크랙
기질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반면에 월드컵의 지네딘 지단이 대회 내내 버스 타다가 1998년에는 결승전, 2006년에는
8강전으로 세탁이라는데 화려한 돌파가 없을 뿐 프랑스 공격에서 지단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걸 감안하면 왜 이런 평가가
나오는지도 모르겠고 6번으로 변신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공격력이나 요새 쩌리 취급 받는 페드로의 공격력에 대한 평가를 보면 납득하기 어렵고요. 오프더볼을 단순히 많이 뛰는 걸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처럼, 온더볼도 자꾸 돌파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드네요. 이래서 키커 평점이 예상대로 안 나온다고 까이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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