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82년 7월 8일, 세비야에서 펼쳐지는 4강전의 주인공은 서독과 프랑스였습니다. 두 팀 모두 출발은 좋지 않았습니다. 서독은 알제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더니 오스트리아를 상대로는 승부조작 논란이 일어날 정도의 졸전을 펼쳤었죠. 프랑스도 잉글랜드와의 첫 경기에서 패배했고요. 하지만 1라운드의 찜찜함을 2라운드에서 만회했으니 서독은 '히혼의 수치'를 뒤로 하고 잉글랜드와 스페인이라는 강적들을 따돌렸으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북아일랜드를 꺾고 올라왔었죠. 두 국가의 관계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프랑스에게는 최초의 결승전 진출, 서독에게는 24년 전의 3:6 참패를 설욕할 기회였습니다.
프랑스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거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만 지금 봤을 때는 분명 좋은 팀입니다. 훗날 레이몽 코파, 프란츠 베켄바우어 등이 대회 최고의 선수였다고 회고한 알랭 지레스의 맹활약이 있었고 미셸 플라티니, 장 티가나, 마누엘 아모로스, 디디에 식스 등 당대의 축구계가 몰랐을 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잔뜩 있었죠. 서독은 2년 전 유로에서 우승할 때 뛰었던 11명 중 8명이 있었죠. 주장 베르나르트 디츠가 물러나고 베른트 슈스터가 불화로 빠지긴 했지만 피에르 리트바르스키가 등장하고 볼프강 드레믈러 등이 합류했었습니다. 문제는 팀의 에이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스페인전에서 당한 햄스트링 부상으로 경기를 뛸 상태가 아니었다는 거죠.
유프 데어발 감독은 루메니게를 벤치에 앉히는 대신 리트바르스키를 톱으로 쓰고 펠릭스 마가트를 미드필드에 기용하기로 하죠. 이 선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브라이트너의 폭풍 드리블로 선제골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이후 2006년 이탈리아와의 4강전을 방불케 하는 난타전 끝에 1:1 무승부로 90분을 마쳤거든요. 그런데 연장전이 되자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연장 시작하자마자 마리우스 트레조한테 얻어맞은 겁니다. 남은 시간은 약 28분 정도. 사실 후반 막판에 아모로스의 벼락같은 중거리슛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등 경기의 흐름이 살짝 프랑스한테 넘어갔었는데 역전골까지 터지니까 프랑스의 기세가 점점 달아오릅니다. 이쯤 되면 벤치에 앉아있던 루메니게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죠. 안 그래도 루메니게는 연장 시작하면서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메니게가 들어오고 볼 3번쯤 만졌을 뿐인데 수비가 무너지면서 프랑스에게 또 골을 먹힙니다. 기록으로는 루메니게의 투입이 97분, 실점이 98분.
프랑스의 현란한 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지레스의 쐐기포까지 맞아 스코어는 1:3. 남은 시간은 20분, 선수들은 지쳐서 슈틸리케는 미끄러지다 못해 앞으로 고꾸라지기까지 하고 브라이트너조차 어울리지 않게 트래핑 실수를 범할 정도였습니다. 어지간하면 망했어요...를 외쳐야 하는 순간인데... 관우 아니 루메니게가 게임의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합니다.
이 골이 102분. 투입된지 5분만에 나온 추격골이었습니다. 루메니게는 부상이 아니라 연막작전이었던 것처럼 종횡무진 필드를 누빕니다.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공을 받고 돌파하고 빈 공간으로 공을 넣어줍니다. 그리고 6분 뒤...
1982년 올해의 골로 선정될 피셔의 이 바이시클 킥으로 경기는 원점이 됩니다. 1:3에서 3:3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분. 이후 12분간 양 팀은 뒤가 없는 속도전을 펼치며 쉴새없이 상대방의 진영으로 돌진합니다. 결국 승부는 승부차기로 결정나게 되고 하랄트 슈마허가 2골을 막아내며 승리를 거둡니다. 이건 서독쪽 키커가 너무 좋았어요. 슈틸리케가 약한 슛을 쏘다 막혔다지만 1번 - 만프레트 칼츠, 2번 - 파울 브라이트너, 3번 - 울리 슈틸리케, 4번 -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5번 -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6번 - 호어스트 흐루베쉬라니...
이 경기에서 루메니게는 20분 정도 뛰고 1골을 넣은 게 전부지만 그 투입과 함께 경기의 흐름을 뒤바꿈으로써 성공적인 교체가 게임의 향방을 가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남았습니다. 진짜 뛰는 거 보면 다쳤다는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요.
이런 식으로 프랑스 수비를 마구 파헤치는 거죠. 루메니게가 투입되고 1분 뒤에 볼트래핑 살짝 길게 해서 패스 받는 도중에 태클당하는 게 있는데 그거 말고 미스가 있나 싶을 정도로 프랑스 수비진을 마구마구 물먹입니다. 톡톡 치고 나오면 수비 한 명 제끼고 있고 옆으로 살짝 흘려줬다 하면 정확히 서독 선수 발 앞으로 스루패스가 이어집니다. 루메니게가 뛴다 하면 프랑스 수비들이 우르르 움직이고 패스나 크로스 한 번 찌를 때마다 수비들이 몸으로 막고 관중석에선 오! 소리가 터져나오고요. 비록 결승에서 이탈리아에게 무기력하게 패하긴 합니다만 루메니게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와 거의 차이가 없는 4위였는데 결승에서도 이 정도 경기력 보여주고 우승했으면 발롱도르 3연패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경기는 독일에서는 Nacht von Sevilla '세비야의 밤'으로 기억되고 있고 프랑스의 에이스였던 플라티니는 가장 아름다웠던 경기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명경기였죠. 프랑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만도 한 게 플라티니는 부상을 안고 월드컵을 뛰고 있었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자주 합니다. 이 경기에서만 따져도 플라티니가 날린 찬스가 한 3개쯤 되거든요. 그중에서도 백미는 오프사이드 트랩 무시하고 뛰다가 1:1 찬스 날려먹어서 패스 찔러준 티가나가 어이없어 하는 장면이죠. 플라티니가 제 기량을 보여서 지레스와 제대로 듀오 이뤘으면 독일이 발렸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후반전에 슈마허가 수비하겠다고 달려나오다가 패트릭 바티스통과 부딪혀서 이가 부러지고 척추까지 다치는 중상을 입혔는데 아무런 반칙을 안 받았거든요. 어쨌든 프랑스는 서독에게 물먹었고 이후 플라티니가 발롱도르 3연패를 차지하며 루메니게로부터 유럽 최고의 축구선수 타이틀을 넘겨받게 됩니다만... 4년 뒤 또다시 서독에게 물먹으면서 끝내 정점은 못 찍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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